나는 밤고구마를 좋아한다.
미국 살기 힘든 점 중 하나는 이런 고구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고구마가 있긴 하지만 밍밍한 얌(yam)이나 물고구마가 대부분.
내게 고구마란 자고로 한 입 베어 물면 목구멍이 콱 막히면서 식도가 꿀렁꿀렁하다 '이러다 죽는 건가?'싶어야 제대로 된 고구마라 할 수 있다. 임종 직전에 우유 한 모금이나 열무김치 한 조각을 내려 보냄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귀환하는 짜릿한 여정을 통해, '남은 생은 더 귀하게 살아봐야겠군' 같은 다짐도 한번 올라와 주는, 고구마의 의미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청하지 않은 친절 베풀기에 취미가 있는 남편은 지난주 멕시칸 마켓에서 '고구마'를 사 왔다. 고구마가 아니라 얌을 또 사 온 것이다.
'아찌는 고구마를 좋아한다. 멕시칸 마켓에는 고구마가 없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얌이 있으니 일단 사가면 아찌가 나의 친절한 의도를 보고 고구마는 아니지만 얌을 맛있게 먹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가. 정곡을 찌르지 않고 '그저 비슷한 맛'이 주는 허무와 결핍을 그는 정녕 알지 못한단 말인가. 비슷한 맛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전혀 다른 맛을 택하는 부인의 성질머리를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유사 고구마를 사 오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음에도, 한번 입력된 값(아찌는 고구마를 좋아한다)은 웬만해선 수정이나 삭제가 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그래도 아내 생각해서 사 오는 게 어디냐고요?
호호홓. 글쎄.
청하지 않은 친절이 예기치 못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하지 말래도 무신경하게 반복되는 친절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마음의 바닥에는 상대를 매일 새로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자기가 주기 편한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딱딱함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흐즈믈르그으-).
이런 친절은 받은 이는 번뇌만 받았는데 주는 이는 뭘 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이게 쌓이다 보면 '왜 우리 아내는 내가 이렇게 오랜 세월 잘해줬는데도 불만만 가득한가?'로 이어진다.
그와 나의 삶은 이런 고구마적 서사로 가득 차 있고, 나는 이런 친절의 생존자로 11년째 생을 이어가고 있다.
"근데 이번 거는 좀 다르게 생겨서 사 온 거야. 지난번 얌은 껍질이 보라색이라서 내가 속았는데 이번엔 그냥 희멀건 하잖아? 직원 말로는 이게 맛있데."
껍질만 봐도 속 맛이 그려지는 희멀건한 얌을 바라보며, 정말 내 목구멍에 어떠한 타격도 날릴 수 없을 것 같이 생긴 이 뿌리를 심드렁히 씻어 오븐에 넣어본다.
열과 시간에 힘입어 속성에 변화가 일어난 고구마. 하나를 집어 껍질을 벗긴다. 아니나 다를까 밤고구마와는 거리가 먼 질감에 긴 한숨이 흐르고, 숨이 나간 자리만큼 고구마를 힘없이 베어 물어 허무를 채운다.
.
흐음.
어랏.
동공이 빅뱅한다.
세상에.
맛있어.
물렁한데 맛있네.
물렁한데 맛있을 수가 있네.
남편을 입력값 수정 안 되는 사람으로 보던 내 시선이야말로 세상 무엇보다 딱딱했던 것이다. 혼자 멕시칸 마켓에서, 뿌리채소 섹션 직원과 고구마에 대한 성찰을 나누며 희멀건한 고구마를 요리조리 살펴 담는 남편을 그려본다.
고구마가 된 남편이 터벅터벅 걸어가다 뒤돌아보며 말한다.
예쁜 것만 골라 사 왔어...
무신경한 반복 아니야...
너도 그럴만해서
나도 그럴만해서
이런저런 서사를 서로에게 덮어 씌우고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며, 삐졌다 감동했다 그러고 살아간다.
이 사람을 잘 모른다고
매일 아침 다짐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