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사유도 좋지만 그저 바라봄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와인잔
집에 새로운 와인 잔 네 개가 들어왔다.
남편이 선물받아 온 모양인데 한 손에 하나씩 잡고 '쨍-' 시켜보니 소리가 좋았다.
좋은 걸 넘어서서 사실 황홀한 소리가 났으니 웬만한 싱잉볼은 고개도 못 내밀 정도였다. 서로 충돌하는 순간에서 소실점에 이르기까지 장엄하고 섬세한 떨림이 오래 지속되다 막판엔 찡긋 웃어보이기까지 하는게 아닌가. 당연히 한 번만 할 수 없었다.
쨍-
찡긋.
쨍-
찡긋.
텅빈 얼굴로 잔 두개를 손에 쥐고 잘도 갖고 노는 나를 보며 남편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뿌듯한 표정은 그를 잘 생겨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한번도 이 사실을 알려준 적은 없다. 남편은 의외로 쌔꼼한 구석이 있으므로 특정 표정 남용을 막기 위해 이런 정보는 공유하지 않는다. 그의 뿌듯함이 온전한 뿌듯함으로 남기를 바라는 깊은 사랑이다.
와인잔 밑 그림자가 특이해서 가만 쳐다보니 천장 조명 내부가 세밀화처럼 식탁에 그려져있다.
세상에. 와인잔 밑이 어둡다더니. 덕분에 천장조명 내부 구조를 여실히 알게 되었다. 램프가 세개나 들어가 있는줄도 몰랐다. 세 개 중 하나는 노란 빛, 나머지 두 개는 하얀 빛이었으나 와인 색의 영향으로 그림자에 왜곡이 일어났다.
우파니샤드에서 '옴(ॐ)'이라는 글자를 풀 때 참 재밌고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천장 조명과 와인잔, 그리고 그것의 그림자에서 옴이 보였다.
두더지
메도우에 멍때리고 누워있다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등에 누군가가 낳은 예쁜 생명체가 와서 엎어지기도 하고, 두더지가 어떻게 자기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지도 관람할 수 있다.
달성공원 돗자리에 납작하게 누워 풀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흙더미가 미세하게 들어올려지며 설치류의 뒷통수를 가진 생명체가 솟아올랐다.
손바닥만한 흙더미 주변으로 돋아있는 클로버들을 두어번 정도 파먹고 쏙 들어가더니 이내 또 고개를 내밀어 두어번 파먹고 쏙 들어가기를 반복. 파먹은 자리만큼 정확히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원형으로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파먹다보니 뒷통수로 시작해 옆통수, 이제 드디어 앞통수를 볼 수 있는 각도가 펼쳐졌을 때, 본의 아니게 나와 눈이 마주쳐 버린 두더지.
무서워서 피할 줄 알았는데 이 두더지는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좀 멋있었다. 쥐랑 거의 똑같이 생긴 외양에 살짝 겁도 났지만 나도 인간종으로서의 기개를 펼쳐보이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더지 눈에 내가 보였다.
또 고구마
400도에서 20분 구워 꺼낸다.
5분 정도 기다려 한 김 식히면 양반처럼 우아하게 먹을 수 있지만 물론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어뜨어뜨 손으로는 저글링, 입으로는 호호 불며 한입 조심히 베어물고 맛있어서 발도 동동 굴러주고 그럴려고 먹는것이다.
고구마를 만든 이가 내 고구마 먹는 모습을 봤다면 '고구마 만든 보람 있네. 쟤 좀 봐봐. 저 아이 인생에 고구마가 떨어지지 않게 만전을 가해야겠어.'라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목적을 위한 수급책으로 청하지 않은 친절을 베풀어야 사는 남편이 내 인생에 등장했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구마가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고구마를 한 김 식히게 되면 껍질과 속살 사이에 수증기가 안착해버려 눅눅한 재질로 변한다. 저글링해가며 호호 불기도 하고 난리를 펴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한 김 식힌 고구마는 껍질과 속살의 온전치 못한 분리로 실패한 북경오리구이와 비슷한 슬픔을 자아낸다. 그래서 한 김이 지나기 전에 고구마를 다 먹어야 하기에 미니 오븐에 하나만 넣어 구워 먹는다.
물론 나는 하루에 두번 굽고 그런 사람은 아니다. 먹을 땐 열렬하게, 다 먹고나선 손 탁탁 털고 미련없다. 친구 만나서 놀 때는 열렬하게 놀다가 평소엔 연락 안하는 내 모습을 닮았다.
새순
유난히 아침 산책이 눈부셨던 오늘.
앞마당에 나무는 어쩜 이리도 매일 새나무인가. 새삼스레 생전 처음 보는 나무보듯 뚫어져라 바라본다. 사시사철 올라오는 새순에 햇귀가 걸려 달랑이는 모습을 보자니 오늘 나는 어떤 새순을 내어놓을지, 나의 새순은 이 새순의 정진력에 부끄럽지 않을지 한 찰나 그곳에 있어본다.
새순을 내지 않는 존재는 겨울이거나 생명과 멀어져 있다.
겨울이면 푹 쉬고 아니라면 꼬물꼬물 새순을 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