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세 개
자그레브 중앙역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었다.
기차는 플랫폼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좌석 주변을 휘- 둘러본 나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짐 꾸러미를 양손에 움켜쥔 채 기차가 멈출 때까지 멍한 시선은 창 밖을 향해있다. 완전 정차를 향한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앉아 있으려는 엉덩이가 나지막이 말한다.
'내리기 싫어.'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은 항상 고역이었다.
예닐곱 시간 정도를 함께한 이 공간은 이제 내 집 마냥 정이 들어버렸는데, 다 버리고 낯선 도시로 혼자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기차를 내릴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바닥부터 소용돌이치곤 했다.
'뭐 하러 이런 낯선 땅에 와서 생고생일까.'
'나는 대체 왜 이 짓을 또 하기로 한 걸까.'
하필 창 밖에 비도 온다.
영원히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길 염원하던 엉덩이는 굳은 결심을 하고 툴툴 털고 일어났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잠자는 분위기가 아닌, 파티애니멀들로 범람하는 호스텔이었고, 음악이 일으키는 진동은 새벽 5시까지 계속되었다.
밤새 뒤척인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으니 커튼 사이로 쨍한 햇살이 내 우울에 불을 질렀다. 우울한 날의 햇살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것도 잘 없었다.
여행 중 찾아오는 우울은 무기력보다는 두려움과 결합하는 특징이 있었기에 나는 그 새카만 싹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미친 듯 걷거나 먹을 갈았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쥔 손으로 동그라미를 계속 그리다 보면 새카만 우울은 켜켜이 더 새카만 동그라미에 무력화되곤 했다. 걷기와 먹 갈기는 오랫동안 나의 구원이었다. 지금은 구원보다는 기쁨이지만.
나는 벌떡 일어나 붓과 먹을 챙겨 밖으로 나가서 햇살과 대치했다. 따갑고 기분 나빴다. 판판한 대리석이 곳곳에 자리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터벅터벅 걸어가 차갑고 맨드라운 돌바닥 위에 벼루를 놓고 물을 부었다.
무념무상
동글동글
먹 쥔 손으로 벼루에 원을 세 개 정도 그렸는데 난데없이 마음에 불이 들어온다.
'잉? 뭐지? 왜 마음이 멀쩡해졌지? 뭐야. 동그라미 세 개로 괜찮아질 거였어?'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우울이 별 게 아니었는지 마음 전원 켜는 법에 익숙해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밝아진 김에 동그라미를 백개 정도 그렸다. 햇살은 더 이상 따갑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내게 모든 것을 주는 사랑으로 다가왔다.
나는 멍하니 마음에 떠오르는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우와... 이게 뭐예요?"
"'음악은 물이다.'"
"음악이 물이라고요? 세상에. 저 이거 해도 돼요? 얼마예요?"
"100쿠나요. 한글이고 나비체예요. 맘 같아선 그냥 드리고 싶지만 휴학생이라 이렇게 글씨 쓰면서 여행 중이라..."
"그럼요. 당연히 드려야죠. 저... 혹시 제가 티셔츠를 사 올 테니 옷에도 그려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얼른 사 오세요!"
10분쯤 지났을까. 티셔츠를 손에 들고 환하게 빛나는 치아를 드러내며 육상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듯 내 앞에 멈춰 선 그는 핵핵대며 물었다.
"무슨 공부해요? 학부생? 대학원?"
"대학원 입학 하자마자 재미없어서 휴학했어요. 국제지역학."
"지역학? 그런 건 처음 들어보네요."
"학제적(interdisciplinary) 성격이 강한 분야예요."
글씨 쓰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고, 내 글씨를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도 대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그마한 동그라미가 만들어졌다.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는 것 같았다.
어둑해질 무렵 그가 말했다.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제 친구를 꼭 소개해 주고 싶거든요. 토미슬라브 광장 근처에 맛집 있는데 거기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