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달리기
브런치를 잠시 - 아니 좀 오래 - 쉬었다. 이유는 잦은 이동과 달리기로 촉발된 루틴의 변화. 많이 돌아다니는 삶은 그냥 내 팔자라서 심신이 고단해도 그러려니 하고 사는데, 그 위에 달리기를 얹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달리기보다는 산책파였다. 창밖으로 아침에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힘들게 왜 뛰나 싶었고 산책이 나에게 더 맞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건 내가 마지막으로 산책했던 날까지 내 삶에 유효했다. 그러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사건 당일, 나는 어김없이 늦은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저수지 말고 선셋 불러바드 쪽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개를 산책시키던 아저씨가 내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블루 혼다 차량 조심해요!"
목소리에서 앞뒤 정황이 통으로 느껴져서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나왔던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동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했지만 몸이 이끄는 대로 일단 움직였다. '제발 내 골목으로 진입하지 마. 가던 길 그냥 가.' 주문을 외며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이어나갔으나, 내 등 센서는 서서히 접근하는 차량 한 대를 감지했다. 순간 이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면 나는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젤 못하는 일이 달리기라서 두려움과 짜증이 엄습했다.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내가 가장 못 하는 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은 정말이지 화가 많이 나는 일 아닌가.
뒤에서 접근한 차량이 옆으로 지나칠 무렵 나의 주변시야가 감지한 색은 블루가 아닌 오렌지브라운이었다. 십 년 감수한 날숨을 뱉으며 나는 결심했다.
'달리기를 해야겠어. 누가 잡으러 오면 적어도 10미터는 도망갈 수 있어야 될 거 아니야. 그게 내 목숨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지. 그 사이에 소리도 지를 수 있고, 플랜 BCD도 구상할 수 있어.‘
그날 후로 나는 석 달간 매일 달렸다. 여행 중에도 달리고 시댁에서도 달렸다. 쇼가 있는 날도 달리고 샤워하고 나갔다. 첫 달엔 5분, 지금은 10분 정도 달린다. 욕심은 금물. 오직 달리는 순간의 기쁨에 집중한다. 산책하던 아찌가 '아찌 4.0'이었다면 달리기 하는 아찌는 '아찌 5.0'이다. 이건 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나만 아는 미세한 변화다. 산책 시절과는 다르게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고 그냥 달린다. 일단 몸의 변화만 적어본다.
변화
땀 흘리는데 재능이 없었는데 재능 생김. 땀나니까 피부 좋아짐. 수면 질 향상. 식욕 증가. 잔근육 및 체중 증가, 생각, 감정, 오감 처리 원활, 달리기 욕심이 턱걸이로 번짐.
턱걸이
턱걸이 연습을 시작한 지는 두 달 정도 되었다. 처음엔 턱걸이는 꿈도 못 꾸고 매달리기 20초 정도 겨우 버텼다. 패들링을 꾸준히 해왔음에도 턱걸이는 다른 근육인 모양이었다. 매달리기 초수 늘이기에서 점프해서 턱걸이 성공에까지 50일 정도 소요되었다. 이제 점프 없이 점잖고 평범한 자세로 턱걸이 하나 가능!
직면
달리기는 나의 약점이자 불편이자 이번 생에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루 혼다가 건드린 생존 본능에 의해 시작된 달리기가 이런 기쁨을 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내 삶의 다른 ‘달리기들’, 이유 없이 싫고 두렵고 못 본 척하고 싶던 것들을 조용히 직면하는 시간을 가졌고, 크고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자 루틴이 변했다. 글보다 글씨에 시간을 쏟게 되었다.
나는 내 몸이다
예전의 나는 정신력을 체력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둘은 하나고 나눠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그냥 반대로 살아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니고 내 안의 트렌드가 변해서 그냥 따라가 보는 것이다. 새로이 생성된 이 리듬을 거부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