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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Oct 29. 2022

소크라테스 시절

아테네의 등에

요즘 들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청년들이 버릇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꼰대가 되어가나 싶어 '청년들은 버릇이 없어야 마땅하지!' 생각하다가도 사람인지라 짜증은 난다. 수년간 이 짓을 하다 보니 하루에 대화 상대는 서너 명 정도가 적당한 것 같은데 물론 사람들은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나도 그들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 보통 일곱 명 정도는 만나는 편이다. 내가 아테네에서 내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신탁이 거짓 일리도 없고 내가 주변을 둘러봐도 나 만큼 자신이 아는 말만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오늘도 이렇게 사람들과 두런두런 얘기하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탁(그래피티체_agora), 2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사실 내심은 두런두런 얘기한다기보다는 시종일관 사랑의 지적질을 하고 있는 것인데 상대가 배움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상처를 입지 않도록 최대한 육바라밀을 가동하여 말하는 편이다. 가끔 혼자 쉬고 싶은 날도 더러 있어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라치면 나 말고는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길을 나서게 된다. 


아고라에서 무작위로 걸려드는 이들과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나는 아테네에서 각 분야에 영향력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생각하는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 물론 지적질을 하러 가는 것이다 -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런 명망 있는 자들의 명망이 도대체 어떻게 얻어졌는지 의아해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는 대화 중에 그들의 추함에 대해 보이는 데로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말의 그물을 넓게 던지는 편이다. 그리고는 서서히 조여 오는 방식으로 질문을 유도하여 상대가 진리에 걸려들도록 만들었는데, 이 방법은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으면서 교육 효과가 확실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지불식간에 스스로의 무지를 자기 입으로 시인하게 되는 화법이라 대화 상대가 뒤늦게 화를 내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무지(그래피티체_agora), 2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이래서 내가 아테네에 적이 많이 생겼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이 짓을 멈출 수가 없다. '아테네의 등에' 노릇을 해야 할 팔자를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일평생 무지한 자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일침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재밌을 때도 많다. 여기서 재미란 맹자가 말했던 호연지기(浩然之氣)적 재미를 말한다. 나는 호연지기적 행위에 관여할 때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호연지기가 올라오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나는 재미를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대에 따라 가끔 일침으로는 택도 없는 경우도 많은데, 위선자 부류의 인간을 마주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런 인간들은 자기 생각에 선행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고 다니는데 그 행위의 밑바닥에는 '선(善)'의 실천에 대한 진실된 마음은 없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만 그득하여 그가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행위들은 악업으로 이어진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영향력이라도 갖게 되면 많은 이들을 어지러운 길로 내몰 것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이름 알려진 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진선미를 아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철학자(그래피티체_agora), 2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진리와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참된 예술가는 참된 철학자이다. 비슷한 연유로 진선미에 통달한 참된 시인은 시성(詩聖)의 경지에 있기에 그런 자들의 창작 행위는 주변을 밝히는 행위가 된다. 말단적 재능과 기교는 귀는 홀릴지언정 영혼에 울림은 줄 수 없는지라 이런 것들은 영혼의 성장과 무관하기에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둘의 구분이 쉬운 나는 오늘도 사람들을 위해 지적질을 하고 다닌다. 최대한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말은 한다만 무지 자체가 재앙이기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재앙을 발견한 그들은 치욕이든, 분노든, 억울함이든 그것을 오롯이 겪어내는 수밖에 없다. 위선자 부류의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 발견한 재앙에 유독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가끔은 그 모습이 왠지 통쾌하고 재밌어서 집에 오는 길에 실실 웃기도 한다. 이런 재미는 호연지기적 재미는 아니지만 그냥 나도 인간이기에,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상대하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기에 그 정도는 스스로 용인하는 편이다. 


이렇게 삶의 재미를 중시하다 보니 칠순이 넘은 나이에 법정에도 서보고, 거의 자발적으로 선고받은 사형으로 생도 마감해 본다. 심히 마음에 드는, 나 다운 방식의 죽음이다. 내가 법정에서 이렇게까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친구들은 사색이 되었는데, 웃긴 건 내 반대편에 있는 자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는 것. 내가 그들 귀에 거슬리는 언행을 하고 다녔을지언정 그들 안의 다이몬은 나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고함치고 있음을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다이몬(그래피티체_agora), 2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테네에서 제 잘났다 하는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내가 하는 변론을 들어보고자 이렇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내 평생 갈고닦아 온 일침 놓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판이 있을까 싶어 가장 맵고 따가운 침을 그들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찔러 넣고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음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으니 생의 말미에 이런 판을 깔아준 밀레토스에 감사함마저 밀려온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설파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처형당하지 않고 내 할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조금 더 성숙한 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영향력 있는 자들 앞에서 오늘처럼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다녔을 것이다. 


내가 애정 하는 친구이자 재력가인 크리톤은 자신이 나를 이곳에서 빼내지 못하면 평생 욕먹고살아야 하니 이제 그만 고집부리고 자기 말 들으라며 수차례 사정했지만, 나는 내심 얼른 이 거추장스러운 육신 따위 벗어버리고 에테르계를 유영하며 나보다 지혜로운 자들과 맘껏 놀 생각에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친구가 애 닳아하는 걸 보고 마음이 좋을 리 없는 나는 친구에게 왜 내가 죽는 행위가 지금 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도 선업의 결과를 불러올 것인지, 지금까지 나를 키워낸 아테네에 대한 내 사랑이 얼마나 지극 한 지에 대하여 거듭 설명하였다. 크리톤은 내가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설득을 포기했다. 

불멸(그래피티체_agora), 25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어려서부터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죽음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서워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뭔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무서워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가 아는 건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 하면 할수록 나의 진선미는 더 밝은 빛을 뿜어냈고, 이 행위는 나를 성장으로 이끌었다. 뭔가를 모를 때는 그것을 알 때까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 내 안의 신과의 깊은 접속을 통해 납득할만한 결론에 도달하면 명상에서 빠져나오곤 하였다. 


내 영혼은 이미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독배가 달다. 


우주여정(그래피티체_agora), 2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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