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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Oct 21. 2024

평평한






하루종일 몸에 들고 나는 감정들이 꿈을 통해 수평 상태에 도달하는 느낌이 종종 드는데, 이를테면 지난주 한글날 나는 하루종일 많이 들떠 있었다.


작년처럼 USC 초청으로 글씨를 썼는데, 날씨가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대학생들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무리를 해버렸고 - 생글생글 귀여운 것들을 보면 무리하게 된다 - 행사 후에 맷이랑 레베카랑 한참 놀다 집에 왔는데도 여흥이 가시질 않아 달리기까지 해야 했다.


땀 뻘뻘 흘리고 집에 와 샤워를 하는데 방울방울 귀여운 얼굴들이 맺혔다. 나는 부러 샤워를 빨리 끝냈다. 동의보감에서 즐거움이 너무 지속되면 몸에 해롭다고 했기 때문이다. 수건으로 방울들을 툴툴 쳐내고 진수성찬을 - 우리 집 진수성찬의 기준은 반찬 세 개 - 차려 남편과 넷플릭스를 보며 저녁을 먹고 딥 스트레칭을 좀 하다가 드디어 잘 시간이, 꿈을 꿀 시간이 되었다.


두근두근 영화표 예매해 놓고 상영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적당히 까슬하고 부드러운 침대 시트 속으로 기어들어가 개구리헤엄을 친다. 허투루 산 날은 개구리헤엄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좀 칼 같은 구석이 있는데 허투루 살아놓고 안 그런 척 헤엄을 쳐 보면 본연의 그루브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이미 의식은 꿈 안으로 들어와 있다.


스탠리 큐브릭 풍의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방을 찾아 나서는데 복도가 얼마나 긴지 소실점조차 보이지 않는다. 멀쩡했던 바닥이 갑자기 질척거려 쳐다보니 진흙창. '뭐지?‘ 하는 찰나 진흙 속의 뭔가를 밟았는데 어떤 생명체의 꼬리.


꼬리를 밟힌 생명체는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복도 반대편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괴물 몸통이 복도만큼 길다는 걸 깨닫자 소름이 비늘이 되어 온몸을 뒤덮었다. 용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생명체는 멀지만 분명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며 광속으로 달려들었다.


"아무 방이나 열고 들어가! 어서!"


꼬리를 중앙에 두고 떨어져 있던 남편에게 소리치고 나도 바로 옆에 있던 방으로 뛰어들었다. 완전히 따돌리려 창문을 깨서 또 탈출했는데 그 사이 괴물이 내 방을 뚫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달려서 될 일이 아니군.'


나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 발을 휘적이며 이륙을 시도했고 이내 하늘로 솟았다. 괴물도 내게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따라 솟았다. 나는 급추락과 솟구치기를 반복하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기도 하고 또 들켜서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내 동작을 몇 수나 내다보며 손쉽고 집요하게 나를 쫒는 괴물 앞에 무력해진 나는 공중에 눈물을 흩뿌리며 밤새 달아나다가


이 정도면 그냥 잡아 먹히는 게 낫겠다 싶어 다 놓으려던 찰나, 남편이 커피콩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괴물이 픽셀화되며 부스러졌다. 전날의 기뻐 들뜬 마음이 비로소 이렇게 상쇄되었다. 두려움에 눈물까지 치러야 평평해지는 기쁨이었다.




꿈은 빗이다.

퇴근 후 씻고 머리 말릴 여력도 없이 쓰러져 자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밤새도록 정돈한다. 과거의 기쁨이나 슬픔에 취해 살지 않도록 무섭도록 꾸준하게 수평을 향하며 매일 아침 나에게 새로운 도화지를 건넨다.




매일 보는 이름모를 풀인데 어제는 누가 이발을 해 놓았다. 세상에 웃긴 사람 왜케 많아.


달리기하다 주웠다. 뭔지 모르겠는데 마음에 든다. 잘 함 키워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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