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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Sep 20. 2021

위대한 여성 뮤지션들

이 글은 얼마 전 모 국립대학교에서 했던 '위대한 여성 뮤지션들' 강의 노트에 뼈와 살을 붙인 것이다. 여기서 다룬 사람들은 누가 더 위대하고 덜 위대한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다. 120분이라는 시간 제약 때문에 그나마 이 5명(패티 김, 심수봉, 장덕, 마돈나, 휘트니 휴스턴)에서 그친 것이고, 사실 준비했던 사람들은 더 많았다. 다루지 못한 양희은, 이상은, 에디트 피아프, 비요크, 조니 미첼 등은 언젠가 적절한 때가 오면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패티 김


패티 김의 '패티'는 패티 페이지의 '패티'에서 가져온 것이다.


패티 김의 본명은 김혜자다. 1938년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1.4 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가 거기서 성남초등학교를 다녔다. 김혜자는 중학교 때 국악원에서 남도창을 배워 그 어렵다는 심청전까지 완창해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쥐었고 또 소프라노 김천애에게 성악 발성을 사사하기도 했다. 노래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김혜자는 서울 중앙여자고등학교를 나와 취직 자리를 알아보던 때 기타 들고 집에 놀러 오던 오빠 친구 곽준용을 통해 베니 김을 소개받는다. 트럼페터였던 베니 김은 주한미군 연예인 용역사업을 하던 화양흥업을 이끌던 인물로 본명은 김영순이다. 베니 김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의 남편이기도 했다.


1958년 8월 김혜자는 린다 김이라는 이름으로 미8군(*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에 머물다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서울 용산 등 한국 전 지역에 흩어져 주둔한 미국 육군 지휘 조직) 무대에서 데뷔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린다 김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혜자는 평소 자신이 즐겨 부른 가수 패티 페이지의 '패티'를 가져와 패티 김으로 예명을 변경, 이듬해부터 무대에서 쓰기 시작했다. 예명을 바꾼 이후 패티 김의 가수로서 앞날은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간다.


1978년 개관 직전의 세종문화회관 모습.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민회관이 불탄 자리에 새로 들어섰다. 사진=서울시.


패티 김에겐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었다. 시작은 1960년 광복 이후 최초로 일본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NHK 한일 문화교류 친선 음악회' 무대에 서면서부터였다. 이후 미국 진출 전 한국에서 '리사이틀'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것도 그였으며 1966년 TBC '패티김 쇼'를 진행한 일, 그러니까 방송 프로그램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다.('패티김 쇼'는 조용필의 방송 데뷔 프로이기도했다.) 패티 김은 또 1978년, 대중 가수로선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을 열며 장르 계급주의자들로부터 은근히 차별받던 대중음악의 자존심을 지켰다.


1966년 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해나가던 패티 김은 어머니 병환으로 일시 귀국, 그 길로 한국에 눌러앉게 된다. 그 사이 미국 가기 전 녹음해두었던 박춘석의 곡 ‘초우’가 신성일, 문희가 주연한 동명 영화와 함께 이른바 ‘대박’이 나면서 패티 김은 명실상부 슈퍼스타가 됐다.(사실 '초우'는 문주란이 먼저 불렀던 곡이다.) 1950~90년대까지 활동하며 무려 2천700여 곡을 남긴 박춘석은 손인호의 '비 내리는 호남선',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남진의 '가슴 아프게' 등으로 당대를 휩쓴 스타 작곡가였다. 패티 김의 대표곡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역시 그의 작품이다. 박춘석은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2010년 3월까지 무려 16년 간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패티 김은 '초우'가 히트한 그해 12월, 만난 지 6개월 된 길옥윤과 결혼했다. 길옥윤. 패티 김 음악 인생을 말하기 위해 박춘석과 함께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이름이다.


패티 김과 박춘석(왼쪽), 패티 김과 길옥윤. 사진=패티 김.


길옥윤(본명: 최치정)은 1927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치의학과를 나온 그의 활동명은 일본 유명 작가 요시야 노부코(吉屋信子)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이름을 딴 요시야 준(吉屋潤)을 한글로 쓴 것이다.


패티 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 ‘이별’, '9월의 노래'와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감수광’, ‘당신만을 사랑해’ 등 3천500여 곡을 작곡한 길옥윤은 1982년 박춘석과 태양음향주식회사를 세워 회장직을 맡았다. 이듬해엔 서울예술전문대학교 실용음악과 신설에 앞장서 주임 교수로 취임한 그는 1984년 서울 서초동에 뮤직 살롱 ‘창고’를 열어  재즈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길옥윤은 음악 저작권 확립을 위해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66년 정치인 김종필이 주례를 본 패티 김과 길옥윤의 결혼식엔 하객 2천 여 명이 참석했다. 부부는 하객들에게 특별 제작한 LP를 선물로 주었다. 사회는 '후라이 보이'로 유명했던 곽규석이 봤다. 그러나 둘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길옥윤이 술을 너무 좋아했기 대문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당시 세상은 "그 착한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투로 패티 김을 일방적으로 탓했지만 이혼은 전적으로 술을 즐긴 길옥윤의 탓이었다. 그는 술을 찾아 2, 3일 행방불명되기도 했고 샹들리에를 기타로 깨 발을 다친 패티 김을 응급실로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에게도 말 못 할 상처는 있었다. 어린 시절 아들을 낳지 못한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간 것이다. 그 일은 길옥윤에게 평생 상처로 남아 스스로를 "불쌍한 놈"으로 여기게 했고 사회적으론 냉정한 사람으로 살게 했다. 당연히 술은 그런 길옥윤에게 좋은 친구였을 터다.


조영남이 패티 김을 인터뷰 해 쓴 책 '그녀, 패티김'. 이 책은 길옥윤과 패티 김의 인연을 비롯한 그의 인생 전반을 조망해볼 수 있게 해 준다. 사진=돌베개.


그렇게 두 사람의 부부 인연은 1972년 '이별'이라는 노래와 동명의 영화(역시 신성일이 주연을 맡았다)로 불안하게 암시된 뒤 그해 9월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패티 김은 특이하게 '이혼식'이라는 걸 당시 조선호텔에서 열어 남편과 헤어짐을 공식화했는데, 얄궂은 건 결혼식 사회를 봤던 곽규석이 이혼식 사회도 본 일이다. 4년 뒤 패티 김은 자신의 팬이기도 했던 이탈리아인 아르만도 게디니와 재혼해 둘째 딸 카밀라를 낳는다.(길옥윤의 딸 최정아는 1968년 11월에 낳았다.)


길옥윤은 1988년 12월, 친척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20억 원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갔다. 6년 뒤 패티 김은 타국에서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던 전 남편을 위해 '이별' 콘서트를 기획해 열고 길옥윤에게 음악 동료로서 마지막 의리를 지켰다. 길옥윤은 이듬해 세상을 떠난다. 눈을 감기 전 그는 패티 김에게 울면서 미안하다 사과했다고 한다.


길옥윤이 세상을 떠난 1995년, 제37회 일본레코드대상은 '일본작곡가협회 특별공로상'을 고인에게 건넸고 평론가 황문평은 그런 길옥윤을 “60년대 후반부터 가요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 작곡가”라고 평했다.



대중적 영광과 개인적 아픔을 동시에 겪은 패티 김은 뜻깊은 일도 많이 했다. 1992년 미국 LA 흑인 폭동으로 피해 입은 한인들을 돕는 자선기금 마련 콘서트를 비롯해 소외된 여성을 돕는 국제봉사단체 소롭티미스트(SOROPTIMIST) 후원 자선공연, 복지병원 장애인 돕기 기금 마련 공연,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패티 김 신춘대음악회', 나자로마을 자선기금 마련 음악회,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위한 여성의 전화 후원기금 마련 콘서트, 독거노인을 돕기 위한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등을 꾸준히 열었다. 그런 그에겐 감투도 많아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세계 이사(1993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2001년), 한국에이즈예방재단 홍보 이사(2002년) 등으로 활동했다.


박춘석이 눈을 감은 2010년 그는 'Passion, 패티 김은 열정이다'를 타이틀로 걸고 전국 순회공연을 펼쳤다. 2년 뒤엔 공식 은퇴를 전제로 '이별' 콘서트를 열어 그 목소리와 이력을 역사에 새겼다. 패티 김은 은퇴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는 기분으로 무대에 선다. 3분 동안 내 노래로 저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내가 당할 것인지가 결정 난다.


패티 김은 대중에게 "최선을 다해 노래 잘 부르는 훌륭한 가수"로 자신이 기억되길 바랐다. 당연히 그는 그럴 자격이 있다.



심수봉



1978년. 숙명여대 음대 작곡과를 지망했던(피아노 실기에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3번 3악장'을 연주했다)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심민경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제2회 대학가요제 무대였다. 재지한 피아노 전주가 곡을 열었고 그 위에선 의외로 트로트 곡조의 '그때 그 사람'이 흘렀다. 그것은 어디서도 들은 적 없던 '재즈 트로트'였다. 워낙 참신했던 이 곡은 그 덕에 본선까진 올랐지만 지나치게 참신했던 탓에 본상은 받지 못했다. "대학생다운 패기가 없고 너무 프로 냄새가 난다"는 게 이유였다. 심사위원 중엔 재즈를 좋아한 길옥윤도 있었건만 결과는 심수봉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은 그의 편이었는지 '그때 그 사람'은 그해 최고 인기곡으로 남는다. 그 시절엔 큰돈이었을 200만 원을 제시한 지구레코드사의 러브콜에 응한 심수봉. 그는 이듬해 데뷔 앨범을 내며 꿈에도 그렸을 프로 뮤지션이 된다.


1979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한 심수봉 1집. 사진=매니아디비.


심수봉(본명: 심민경)은 나훈아가 쓴 '여자이니까', 박광주의 '젊은 태양', 러시아 민요를 번안한 '백 만송이 장미'를 부른 가수이자 마도로스 남편과 수개월 떨어져 지내야 했던 지인의 사연에 영감을 얻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의 본래 모습(原形)을 향한 자신의 고백이라고 밝힌 '사랑밖엔 난 몰라', 일본의 엔카 황제 이츠키 히로시와 에피소드를 노래한 '미워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 바쳤던 '비나리' 등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다.


1955년 7월 11일 충남 서산에 있는 인간문화재 가문에서 태어난 심수봉의 아버지 심재덕은 이름난 소리꾼이자 민요 채집가였다. 쉰 살 때 이미 자식을 셋 두었던 심재덕은 첫 만남 때 스무 살이었던 심수봉의 모친 장형복을 '댄스 강사'로서 만났다. 이화여대와 숙명여대 강단에도 섰던 심재덕은 그러나 심수봉이 3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심수봉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살아가는 내내 가슴에 새기게 된다.


심수봉은 어릴 때부터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꿈을 유독 잘 꾸었다. 10살 때는 실제 귀신을 만나 '뇌신경 인플레'라는 병까지 얻었을 정도다. 그는 결국 15살 때 인천 무의도에 가 요양을 했다. 어릴 때 이미자의 '정동대감'을 곧잘 부른 심수봉은 이때 기타와 대중음악을 처음 만나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과 '동심초'를 흥얼거리곤 했다. 이후 기타는 심수봉의 분신이 된다.


심수봉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 기타, 드럼을 고루 섭렵했다. 사진=심수봉.


그의 기타 실력은 잉크 회사에 병마개 납품 사업을 하던 이모부 공장 직원에게 배워 크게 는다. 심수봉은 이 시기 샘 더 쉠 앤 더 파라오스(Sam The Sham And The Pharaohs)의 'Wooly Bully'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익혔다. 심수봉은 비슷한 때(중학교 3학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현인의 '신라의 달밤', 이미자의 '해운대 엘레지'를 좋아했던 가정교사가 소개해준 일본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알게 되는데, 이는 심수봉의 음악적 자양분이 되는 일본 대중가요 '엔카'와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심수봉은 드럼도 배웠다. 뭔가에 한 번 빠지면 끝을 보는 그의 성격은 현악기, 타악기를 가리지 않았다. 역사에 묻힌 드러머 이명옥을 TV에서 보고 드럼에 흥미를 느낀 심수봉은 당시 미8군 아나운서였던 '배다른 큰 언니'가 동아방송 전속 악단장 송민영을 소개해준 덕에 재즈 드러머 코지 콜의 'Tapsy Part Two'까지 연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대 최고라 불린 드러머 허영욱의 지도 아래 "리듬 소절에 관계없이 고른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 이때 허영욱에게 배운 기본기는 드럼의 기초를 넘어 앞으로 뮤지션 심수봉이 만들어 갈 음악의 기초가 된다. 심수봉은 그렇게 갈고닦은 실력으로 보컬 그룹 '논스톱'에 들어가 미8군 전용 클럽에서 드럼 연주를 했다. 하지만 미8군 전속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던 선배 드러머는 그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 재즈 피아니스트 쪽이 낫겠다고 설득, 결국 심수봉은 드럼 대신 어릴 때부터 쳐온 피아노를 택한다. 재즈 피아노에 빠지기 시작한 심수봉. 그의 연주에 담긴 쓸쓸하면서도 경쾌한 스윙은 손수길과 신관웅의 지도 덕분이다.


1995년 4월 8일에 방송한 KBS '빅쇼' 심수봉 편. 영상 시작에서 그의 드럼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음악을 떠난 심수봉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자신에게 수봉(守峰)이라는 예명을 준 스님은 남자로서 심수봉을 안으려 했던 파행승이었고, 어느 날 섭외돼 간 정치 연회장은 피비린내로 진동한 한국 현대사의 생지옥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들.


한 도사라는 사람은 10.26 사건 현장에 심수봉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생의 그 시간에 심수봉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라 말하는 등 초현실적(초인적) 말과 행동으로 심수봉의 마음을 얻는다. 심수봉은 한 도사와의 그 사랑을 "영(靈)적인 결합"이라고 했다. 물론 한 도사의 이면을 알기 전까진 그랬다. 사실 한 도사는 여성에게 매우 폭력적인 인간이었다. 한때 동거했던 심수봉에게 막말도 모자라 발길질, 주먹질, 심지어 시퍼런 일본도까지 휘두른 그는 여성에게 순종과 복종을 바란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심수봉은 그가 울고 빌면 용서해주었고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참을성도,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없는 한 도사의 행동은 쉬 바뀌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뮤지션 심수봉'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수봉은 결국 한 도사와 사이에 낳은 아들 승현을 데리고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0.26 사건 현장에 있었던 심수봉(왼쪽)과 신재순. 사진=동아일보.


두 번째로 심수봉을 힘들게 한 남자는 지방 업소 공연 중 만난 박 사장이라는 인물이다. 처음 만날 때부터 심수봉에게 친밀감과 속박감을 동시에 안긴 그는 심수봉이 흠모해온 이츠키 히로시를 '연적'으로 간주하며 본성을 드러냈다. 포항제철 초대 회장인 박태준의 주선으로 이츠키와 심수봉이 만난 일을 두고 벌어진 일이다. 박 사장은 당시 혼인 신고를 하고도 진해에서 이혼한 본처와 살고 있었던 사실도 드러나 심수봉을 아연실색케 했다. 심수봉과 박 사장은 1993년 6월 끝내 이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선 딸 박성희가 태어났지만 심수봉은 그 딸을 키울 수 없었다. 모녀의 아픈 사연은 그가 만든 곡 '아이야'에 잘 담겨있다.



심수봉은 1981년 신군부 정권 때 '10.26 관련 인물'이란 이유로 방송 출연을 할 수 없었다. 일본 NHK가 제안한 이츠키 히로시와 합동 공연의 불발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수봉은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1983년 TBC 인기 라디오 드라마 '여인극장'의 주제곡 '순자의 가을'은 그 시작이었다. 이 곡은 '순자'가 그 시절 영부인 이름과 같아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제목이 바뀌어 가수 방미에게 갔다. 참고로 '여인극장'에는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김국환의 '꽃순이를 아시나요?'도 주제가로 쓰인 바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마침내 심수봉의 방송 출연 금지가 풀렸다. 심수봉은 9년 뒤 MBC 봄 개편 라디오 프로그램 '심수봉과 트롯 가요 앨범'에 발탁, 7살 연하인 김호경 PD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부부 연을 잇고 있다.


"철학이 녹아 있는 시로서 가사"를 지향했던 싱어송라이터 심수봉. 임상수 감독은 10.26 사건을 다룬 자신의 작품('그때 그 사람들')에 심수봉의 곡 제목('그때 그 사람')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임순례 감독도 자신의 대표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사랑밖엔 난 몰라'을 인상적으로 삽입한 적이 있다. 노영심이 쓴 '내 사랑 심수봉'을 부른 가수 이문세는 "대학문화와 성인문화의 연결고리를 자연스레 만들어준 사람"이라며 심수봉을 기렸다.



장덕


'사슴 여인'이 수록된 장덕 3집(1984). 사진=매니아디비.



1977년 제1회 MBC 서울가요제. 진미령이 '소녀와 가로등'을 부를 때 한 고등학교 1학년생이 오케스트라 반주를 지휘했다. 이는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한다는 당시 대회 규정에 따른 것이었는데, 지휘자의 이름은 장덕이었다. '소녀와 가로등'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습작한 것이다.


나에게 '가수' 장덕의 기억은 흐리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내 기억에 장덕은 다섯 살 터울 오빠 장현과 부른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와 솔로 히트곡 '님 떠난 후'로 맺혀 있다. '이별인 줄 알았어요'와 '얘얘', 유작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조금 더 자라서 들었다. 물론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장덕의 작품이었다는 것도 머리가 한참 굵은 뒤에 알았다.


1961년 4월 21일 첼리스트 장규상과 서양화가 이숙희 사이에서 태어난 장덕은 초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을 겪는다. 이 일은 장덕에게 작지 않은 상처로 남아 어딘가 쓸쓸했던 그의 표정(왕방울 눈을 한 장덕의 외모는 한편으로 밝은 듯 한편으론 한없이 슬퍼 보였다)과 그의 음악을 평생 따라다녔다.


1978년 현이와 덕이의 두 번째 작품. 사진=매니아디비.



오빠에게 기타를 배운 장덕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작곡을 할 수 있었는데, 모친은 미국의 대표 남매 듀오 카펜터스에 영감을 얻어 '현이와 덕이'를 미8군 무대에 서게 했다. 이를 계기로 남매는 노래는 물론 70년대 청춘 영화에도 출연하며 일찌감치 연예계 생활에 눈을 떴다.


하지만 부친의 재혼은 장덕을 더 혼란스럽게 했고 급기야 자살소동으로까지 번진다. 1980년 장덕은 결국 모친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으로 간 장덕은 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작곡 공부를 했다. 1년 뒤에는 함께 밴드 활동을 한 남성과 결혼까지 했지만 끝내 이혼하고 만다. 미국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 등록돼 현지 컨트리 가수에게 곡을 줬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였지만 장덕은 1983년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요즘 말로 '컴백'을 감행한 장덕. 컴백 곡은 '날 찾지 말아요'였다.


'사슴 여인'(1984)과 '날 찾지 말아요'를 들고 다시 한국으로 온 장덕을 그러나 대중은 크게 반겨주지 않았다. 그에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솔루션은 먼 데 있지 않았다. 장덕은 오빠와 다시 뭉친다. 현이와 덕이. 남매 듀오는 이 이름으로 그 유명한 곡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1985)를 발표하고 대박을 친다. 한 해 뒤 솔로로 나선 장덕은 자신의 대표곡 '님 떠난 후'를 내놓고 당시 큰 인기를 얻은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 'KBS 가요톱10'에서 5주간 1위에 올랐다. 싱어송라이터 장덕 인생의 정점이었다.


그가 떠난 1990년에 발매된 장덕 추모 앨범. 이선희, 김범룡, 전영록, 진미령, 최성수, 박혜성 등이 참여했다. "하얀 날 하얗게 떠난 친구에게..."라는 문구가 아프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우울증을 앓던 장덕은 약물에 의존해야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빠 장현은 설암 판정을 받는다. 스물아홉 살 장덕에게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0년 2월 4일. 장덕은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녀의 자취방에선 우울증과 불면증 약 세 가지가 동시에 발견됐다. 몇 달 뒤 설암 투병 중이었던 오빠 장현도 34세 나이로 사망한다. 당시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장덕의 비극은 사실 한국 대중음악의 비극이기도 했다.



마돈나(Madonna)


마돈나는 공식 데뷔 1년 여만에 'Like A Virgin'으로 슈퍼 스타가 된다.


팝의 여왕. 본명은 마돈나 루이즈 베로니카 치코네다. 1958년 8월 16일 자동차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에서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마이클 잭슨, 프린스와 동갑이다.) 5살 때 모친이 세상을 뜬 일에 큰 충격을 받고 성장한 마돈나는 미시간 대학교에 무용 전공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가수가 되기 위해 중퇴했다. 


마돈나는 1977년 단돈 35달러를 갖고 뉴욕에 가 백댄서, 모델로 활동했다. 1983년 수록곡 중 5곡을 직접 작곡한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Madonna'를 발표, 965만 장 이상을 팔아 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여기서 마돈나가 단독 작곡한 5곡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당시 대중음악 산업계에 그가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라는(오히려 주도하리라는) 강력한 예고였기 때문이다. 실제 마돈나는 3집 'True Blue'에선 모든 곡들의 작곡과 프로듀싱에 참여했고 이후로도 그런 예술적 주인의식은 매 앨범마다에서 유효했다.


1984년 발표한 2집의 리드 싱글 'Like A Virgin'으로 첫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맛본 마돈나는 1985년 초 또 다른 싱글 'Material Girl'을 같은 차트 2위에 올리며 스타가 됐다. 마돈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앨범일 'Like A Virgin'은 여성 뮤지션 앨범으로서 전 세계 2천만 장 이상을 판매한 최초 작품으로 남았다.


마돈나는 1983, 84년 단 두 장 앨범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마돈나는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성별과 인종, 종교와 연령 차별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그는 행동했다. 예컨대 1989년에 발표한 4집의 리드 싱글 'Like A Prayer' 뮤직비디오에서 흑인 예수를 묘사하고 십자가를 불태운 행위로 '신성 모독' 비판도 불사한 그는(이 일로 당시 최고 인기 가수만 할 수 있었다는 펩시와의 계약이 해지됐다) 페미니즘의 송가로 남은 'Express Yourself'를 발표, 정치철학자 카밀 파야에게 "페미니즘의 미래"라는 평가를 받는다.(마돈나는 1992년 여성 뮤지션으로선 최초로 타임 워너와 합작으로 차린 음반사 '매버릭'의 사장이 된다. 그에게 제시된 계약금은 무려 6천만 달러였다.) 그렇게 재능과 능력으로 보수적 사회 통념에 끊임없이 맞선 마돈나는 1980년대 후반부터 '부모의 경고가 필요하다'는 스티커를 음반들에 붙이기 시작한 '학부모 음악 자료 센터(PMRC)'의 설립에 구체적인 명분을 준 뮤지션으로 역사에 남았다. 마돈나는 단순한 대중음악가 그 이상이었고, 나아가 그 자체 사회 현상이자 스스로가 한 권의 시사 매체였다.


물론 1984~94년까지 10년간 톱텐 앨범 8장에 톱텐 싱글 28곡(이중 7곡은 차트 정상까지 갔다)을 낸 마돈나는 훌륭한 뮤지션으로 먼저 기억돼야 한다. 가령 그는 메인스트림 가수로서 일렉트로닉을 처음 도입한 인물(그의 두 번째 전성기를 열어준 앨범 'Ray Of Light'를 들어보자)로 흔히 거론되는데, 하우스 음악의 대부 프랭키 너클스가 그런 마돈나의 대표곡 'Vogue'를 두고 "하우스 음악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순간"이라 말한 것은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더불어 이는 혹자들이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를 '한국의 마돈나'라 부르는 게 얼마나 어폐인지를 말해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마돈나의 36살 연하 남자 친구 알라마릭 윌리엄스(왼쪽). 사진=마돈나SNS.


또 하나 마돈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이성 관계다. 그는 영화배우 숀 펜, 영화감독 가이 리치와 1989년, 2008년에 각각 이혼했다. 마돈나는 가이 리치와 사이에서 로코 리치를 낳았고, 사실혼 관계였던 트레이너 카를로스 레온과 사이에선 루데스 레온을 낳았다.(마돈나는 아프리카에서 네 명을 입양해 총 여섯 자녀를 두고 있다.) 그 외 래퍼 투팍 샤커와 바닐라 아이스, 축구 선수 로베르토 바조(바조는 마돈나의 구애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NBA 스타 데니스 로드먼,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와도 염문을 뿌린 그는 2010년대 들어 29살 연하 모델 헤수스 루즈, 28살 연하인 댄서 브라힘 자이밧과 교제했고 2021년 현재는 무려 36살 아래인 안무가 알라마릭 윌리엄스와 사귀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와 지방시, 모스키노, 베르사체의 대표 뮤즈인 마돈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비욘세, 레이디 가가의 선구 격이기도 하다. 여자 연예인 최초로 세계 4대 보그(미국, 영국, 파리, 이탈리아)지의 커버를 모두 장식한 사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과 오라(Aura)를 겸비한 그는 앞으로도 유일무이한 대중문화 아이콘으로서 언제 어디에서든 꾸준히 호명될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1985년에 발매한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작. 신해철이 생전에 공연에서 커버한 'Greatest Love Of All'이 수록돼 있다.



나는 살면서 그만큼 노래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90년대 팝 팬들의 영원한 'The Voice' 휘트니 휴스턴. 1963년 8월 9일 뉴저지 뉴어크 출생인 그의 아버지는 해병대이자 연예 기획사의 CEO 존 러셀 휴스턴 주니어였고, 어머니는 프로 백보컬로 활동한 씨씨 휴스턴이었다. 씨씨는 엘비스 프레슬리, 아레사 프랭클린 같은 대형 스타들과 한 무대에 선 실력파로 평판이 자자했다.


당연히 휘트니는 그런 노래 잘하는 어머니에게 노래를 배웠고, 어머니 공연 때 코러스로 무대에 섰다 음반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눈에 들어 데뷔까지 하게 된다.


몇 년간 등장한 신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목소리를 지닌 가수

<롤링 스톤>


1985년에 나온 휘트니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은 '롤링 스톤'을 비롯한 대중과 평단에 똑같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Saving All My Love For You'를 영국과 미국 차트 정상에 올린 이 작품으로 그는 역대 가장 많은 상을 받고 가장 많은 앨범, 싱글을 팔아치울 여성 가수로서 첫 발을 뗐다.


강렬한 데뷔를 치른 휘트니의 두 번째 도약은 1992년에 이뤄졌다. 바로 영화 '보디가드'를 통해서다. 미치광이 팬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인기 가수 레이철 마론을 연기한 그는 돌리 파튼의 'I Will Always Love You'에 새 생명을 주며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함께 90년대 팝 디바로 우뚝 선다.('롤링 스톤'은 해당 곡을 두고 "노래를 45초간 무반주로 부르며 시작할 수 있는 보컬리스트는 거의 없다. 그의 목소리는 거대하고 빛나는 외침"이라며 극찬했다.) '보디가드'는 미국에서만 1억 2천만 달러 이상 수익을 올렸고 전 세계에선 4억 달러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사운드트랙 역시 빌보드 앨범 차트 등장 2주 만에 정상에 올라 무려 20주 동안 정상을 지켜 닐슨 사운드스캔(*미국과 캐나다에서 제작된 음악, 뮤직비디오 판매량을 추적하는 체계)이 판매량 집계를 시작한 1991년 이래 가장 오래 1위 자릴 지킨 앨범이 됐다.(이 기록은 2012년 아델의 '21'이 24주간 1위에 오르며 깨졌다.) 20세기 가장 많이 팔린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남은 '보디가드 OST'는 한국에서도 120만 장 이상이 나가 외국 가수 음반으로 역대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90년대 초중반 당시 휘트니의 인기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돌리 파튼의 심심한 원곡에 피와 살을 준 이 버전은 휘트니 휴스턴이라는 존재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휘트니의 사생활은 표면적인 영광과 다른 길을 갔다. 그는 1989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드 시상식장에서 만난 '  스윙 아이돌' 바비 브라운과 1992 7 18일에 결혼해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을 낳고 2006년에 이혼했다. 16 때부터 오빠들과 상습 복용해온 마약은 그의 인생을 조금씩 갉아먹었고(마약 복용은 '보디가드' 성공과  출산 이후  심해졌다), 1985 'US Summer Tour'부터 시작한 11차례 투어(601 공연) 그의 몸과 마음을 똑같이 지치게 했다.


2012 2 11. 휘트니 휴스턴은 결국 2009년작 'I Look To You' 유작으로 남기고 비벌리 힐튼 호텔 스위트룸 욕조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딸 크리스티나 역시 욕조에서 뇌사 상태로 발견된 지 6개월 만인 2015년 7월 27일, 엄마 곁으로 떠났다.) 사인은 심장 질환  코카인 복용에 따른 익사였다. 이는 휘트니를 두고 자기 생애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평가한 토니 베넷의 말처럼 "마이클 잭슨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죽음에 이은 비통한 소식"이었다. 휘트니의 안타까운 사생활과 죽음의 이야기는 2018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있다.



머라이어 캐리 / 셀린 디옹 / 토니 브랙스턴 / 레이디 가가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브리트니 스피어스 / 핑크(P!nk) / 비욘세 / 앨리샤 키스 / 아델 / 리한나 / 아리아나 그란데 / 메리 제이 블라이즈 / 브랜디 / 모니카 / 제니퍼 허드슨 / 데스티니스 차일드 / 제시 제이 / 켈리 클락슨 / 제시카 심슨 / 리오나 루이스 / 샘 스미스 / 니콜 셰르징거 / 시에라 / 넬리 퍼타도 / 아샨티 / 손승연 / 박정현 / 에일리 / 백예린 / 박진영 / 양파 / 박기영 / 이영현 / 제이미 / 옥주현 (...)

휘트니 휴스턴에게 영향받은 가수들 (출처: 나무위키)


평론가 밥 스탠리는 휘트니 휴스턴이 "1990년대 팝을 완전하게 지배했다"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의 스티븐 홀덴 역시 "가스펠 지향성이 강한 팝, 소울 가창 전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며 가수로서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리고 2022년 12월. 팬들은 '휘트니'에 이은 또 한 편의 휘트니 휴스턴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제목은 'I Wanna Dance With Somebody'로 'I Will Always Love You' 이전 가장 히트한 휘트니의 곡 이름과 같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앤서니 매카튼이 각본을 썼고 '더 위크엔드', '포토그래프'를 연출한 스텔라 메기가 메가폰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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