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Sep 17. 2024

"내 뿌리는 한국인" 프로듀서 YUNGIN의 첫 도전


음악에서 엔지니어는 엄밀히 ‘창작자’라고 할 순 없다. 엔지니어는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더 훌륭한 것으로 빚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령 믹스 엔지니어의 경우 데이비드 “영인” 김(David “YUNGIN” Kim, 이하 ‘영인’)의 말을 빌리면 “아티스트와 프로듀서의 비전을 실현하는 것”이 해당 엔지니어의 역할이다. 창작의 언저리에서 창작의 완성을 돕는 엔지니어들 중엔 그래서 더러 알란 파슨스(Alan Parsons)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객’이 아닌 ‘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예술 세계에선 인지상정일 터. 나도 음악 좋아하고 저들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해볼까?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일은 스스로 나아간다.    

 

영인도 그런 ‘창작자가 되고 싶은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다. 영인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LA로 이민 간 그는 미국 미식축구 리그(NFL) 스타플레이어를 꿈꿨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허리를 다쳐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끝이 없는 절망은 없는 법. 스포츠가 남긴 고통은 초등학교 때 나스의 ‘Illmatic’과 ‘It Was Written’을 통해 알게 된 힙합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영인은 프로 음악가가 되기 위해 미국 젊은이들이 찾는 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 MI)에서 공부하며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그려 나갔다. MI 입학은 당시 그에겐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이후 대형 녹음 스튜디오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영인은 정식 녹음 엔지니어가 되기까지 6년을 정진, 풀타임 음반 믹싱까진 다시 4년을 노력했다. 물론 영인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가진 프로듀서. 그러나 프로듀서로서 가진 아이디어와 비전을 펼쳐내려는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론과 악기 연주력의 부족이었다. 이는 그동안 영인이 음악 제작을 직업으로 삼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그는 곧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다른 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음악을 듣는 귀’였다. 음악의 옥석을 귀신처럼 가려내는 ‘황금 귀’를 가진 거장 프로듀서 릭 루빈이 추구해 온 가치를 영인도 드디어 알아챈 것이다.     



실력과 마인드 둘 다에서 준비를 마친 영인은 마침내 지난 9월 10일, 자신의 첫 번째 앨범 ‘Did You Know? Part 1’을 세상에 내놓았다. “앨범 작업을 하면서 내 뿌리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영인의 이 말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자인 듯 추상(秋霜) 같이 선 동상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아이(아마도 영인 본인일 것이다) 사진을 내건 앨범 재킷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인으로 살며 늘 놓치고 있었던 자신의 또 다른 부분, 즉 ‘한국(인)’을 이번 앨범으로 표현하려던 듯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영인은 ‘집’의 개념이 지리적 위치가 아닌 “마음의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며, 이 앨범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했다.     


마치 영화감독이 캐스팅할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듯, 영인은 자신의 앨범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함께 할 뮤지션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명단의 절반은 자신의 이전 ‘고객’들이었고, 나머지는 본인이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던 아티스트들이었다. 그렇게 2023년 7월, 열 두 곡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서울에 온 영인은 숙소까지 제공해 준 지인의 스튜디오에서 열흘 만에 모든 곡을 녹음했다. 협업 아티스트들의 스케줄과 영인의 열정이 그림처럼 맞아떨어진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다.     



완성된 ‘Did You Know?’의 첫 번째 파트는 지난 4월과 5월에 각각 싱글로 발매한 ‘No Lowkey’와 ‘Homesick’으로 문을 연다. 데뷔 싱글 ‘No Lowkey’엔 제시와 카모가 참여했다. “제시와 카모의 버스(verse)를 듣는 순간 모든 걱정을 떨치고 재미있게 작업했다”는 영인의 만족에 “흠잡을 데 없는 작업이었다”라고 화답한 제시는 “지금까지 경험한 세션 중 가장 자유롭고 창의적이었다”며 재차 소감을 밝혔다. 어린 시절 제시의 팬이었다는 카모 역시 “비트를 듣는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며 이번 작업에 엄지를 세웠다. 힘과 센스가 넘치는 세 사람의 케미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영화 ‘인셉션’과 추리물 정서를 접목한 뮤직비디오를 꼭 확인해 보길 바란다. 참고로 트랙의 작/편곡에 힘을 실어준 차차말론(ChaChaMalone)은 카이(EXO)의 솔로 데뷔작에서 영인과 호흡을 맞추기도 한 실력파 프로듀서다.     



영인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두 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폴 블랑코가 래퍼 창모와 함께 자욱한 일렉트로닉 비트 속으로 들어가는 ‘Homesick’은 “변화된 환경에서 느꼈던 감정”을 풀어내는데 방점을 찍는다. 제목에서나 랩 주제에서나 영인이 이 앨범을 만든 의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곡엔 드레이크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프란시스갓히트(FrancisGotHeat)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해 퀄리티를 살찌웠다. 이 곡 역시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하면 좋은데, 어지러운 어안 앵글과 큐브릭(Stanley Kubrick) 풍 스타게이트의 스릴을 접목한 영상은 곡의 저변에 깔린 도회적 고독감을 배가시킨다. 폴 블랑코는 “영인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작품의 얼굴 역할을 한 저 두 곡 외에도 앨범엔 아직 화려한 손님들로 무장한 여섯 트랙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 루프로 빌런의 활기를 부여잡는 소코도모, 신스(SINCE) 콜라보의 ‘Love Me No More’, 한국계 미국인 래퍼 로스와 던밀스가 함께 한 ‘Speed Up’, 카드(KARD)의 메인 래퍼 BM과 아이콘(iKON)의 바비(BOBBY)가 돈에 관해 수다를 떤 ‘Run It Up’, 저스디스와 히트보이(Hit-Boy)라는 든든한 두 이름을 업고 천천히 일렁이는 ‘Turbulence’, 역시 히트보이가 함께 했고 2020년 대마초 흡연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루피(LOOPY)의 ‘Kingpin’이 청산유수처럼 각자의 색깔을 흘려보낸 뒤, 영인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 박재범이 맡은 마지막 팝 랩 트랙 ‘Stand Out’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로 ‘Homesick’에 이어 앨범의 주제를 정면에서 건드리며 여운을 남긴다. 박재범은 차차말론과 프란시스갓히트, 영인과 함께 곡의 프로듀싱까지 함께 하며 이번 프로젝트에 누구보다 적극 임했다.     


막연하게 음악이 좋아 선택한 엔지니어에서 프로듀서로 거듭난 영인. 이번 결과물이 빛을 보기 위해선 아리아나 그란데, 퍼렐 윌리엄스, 팀발랜드, 켄드릭 라마, 나스, 그리고 “노력은 언제나 재능을 이긴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닙시 허슬 같은 화려한 협업자들 명단과 ‘그래미 3회 수상’이라는 과시적 경력의 그늘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영인 자신이 언급한 좋은 앨범의 조건(“반복성, 깊은 느낌, 중독성의 구현”)이 첫 번째 파트를 지나 두 번째 파트의 혈류로 확장되리라 나는 생각한다. 모쪼록 그의 뜻대로 ‘Did You Know?’가 한국 랩 음악 신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나아가 미국 힙합과 한국 힙합의 가교 역할까지 해내길 기대한다. 음악을 들어본 결과 충분히 가능한 바람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