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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Jul 24. 2021

창조에 대한 광기, 생산에 대한 열망에 대하여

뮤지컬 <레드북>에 대한 짧은 감상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이 작은 펜으로 커다란 성을 지어!



뮤지컬 <레드북>에서 글은 곧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곧 자아의 표출이다. <레드북>에서 영국 남성들은 입을 모아 글은 남성의 전유물임을, 여성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세계관 속 장치인 것이다-우리가 지나쳐 온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글은 곧 영혼의 교감으로, 작가의 내면을 레몬 조각이나 오렌지 조각처럼 고통스럽게 짜내어 완성된 글을 독자가 읽음으로써 그를 진정 흠모하고 이해하며 교감을 이루는 것이 고전적인 글의 존재 이유였다. 순수 문학과 펄프 픽션의 오래된 앙숙 관계를 이 글에서 깊이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글에는 메시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싸구려 갱지에 인쇄된 통속 소설', 펄프 픽션에도 과연 영혼이 실렸는가를 논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되려 '펄프 픽션'의 힘을 주장하는 글이다. 아, 정말이지 글에는 힘이 있다! '레드북' 속 안나의 글은 글을 남성 전유물로 여기는 남성들에게 펄프 픽션인 동시에 전위적인 여성의 고함이었다. '레드북' 속 남성들은 글의 힘을 안다. 단어가 사람을 뒤흔들고 문장이 깊이 매몰되어 있던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여성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이 쓰는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여자는 읽기만 하면 된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여성이 쓴 글은 하찮고, 시시껄렁한 것이며 자격 없는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것이 그들이 믿는, 그리고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아들에게서 손자에게 계승되는 특별한-여성들에게서 유리된 힘을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글이 가진 힘을 나누는 것을, 남성들이 그러하듯 여성 역시 동일한 힘을 쥐는 것을, 안나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가장 공정한-열렬한 지지와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독주를 이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남성 본위의 시대, <레드북> 시대에서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은 바쿠스의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괴짜와 현실 도피자,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넘버는 이렇게 시작된다.


안나, 우린 이상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예요.


장르 소설, 특히 판타지가 포함된 장르의 작가에게 가장 흔하게 들어오는 지적은 '이 작가는 자기 소설 속 주인공과 스스로 지나치게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맞다. 작가는 자신의 글의 가장 첫 독자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넘버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를 이 종이 위에 담는다'는 메시지로 화두를 던진다. 글은 입안에 고이고 고여 짠 소금물처럼 걷잡을 수 없게 흘러나오는 말들을 정수하고 응축해놓은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 고여 가슴이 터질 지경이 되면 글을 토해놓는 것이다. 모든 글은 배설된 것이다. 그야말로 배설물이다. 단지 우리가 가진 영혼이 재료이기에 저마다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 안에서 작가가 보이는 것은 생소하고 도망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글에 정신이 담기는 것은, 누군가의 영혼과 그 영혼이 하고자 하는 말이 담기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은 글을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이룬다. 글을 쓰는 동기는 결국 그런 것이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중 '코렐'은 바람피우는 남편에 대한 증오를 글로 견딘다. 글에서 남편을 수없이 죽임으로써 그를 광기로 몰아가는 감정을 막아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메리'는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욕망을 소설 속 주인공에게 투영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여기는, 그렇다, 오타쿠도 나온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오타쿠 '줄리아'는 말한다. '오만과 편견'의 뒷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 직접 썼다고! 우리는 이것이 팬픽임을 안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 주인공을 보며 느끼는, 같은 종류의 욕망을 줄리아 역시 가진 것이다. '줄리아'의 최애는 다아시다. 미스터 다아시에 대한 영국 여성들의 사랑은 유구하다. 하기야 프로도와 셜록 홈즈는 일반적 연애 상대로는 적합하진 않으니, 다아시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은 종이 위에 온전한 '자신'을, 자신의 욕망을, 자신만의 영혼을 남긴다. 자신의 가장 은밀한-짝사랑 상대에 대한 성적 욕망-욕망을, '레드북'속 남성 본위 사회에선 비난받아 마땅할 남편 살해에 대한 욕망과 단지 남편 살해를 넘어 그러한 욕망을 가진 스스로의 존재를 종이 위에 남기는 것이다. '레드북'속 남성들은 또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는 것을 비난한다. 안나는 말한다, '나도 당신처럼 손이 있고 발이 있는 존재다!' 남성들이 원한 것은 여성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표하는 '멋진'신사인 자신들의 고매한 품격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일방적 욕망이지, 여성 본인이 스스로 가진 힘을 깨닫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다. 영국 신사라는 작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다지도 징그러운 것이다.


'영국 신사'분들을 변호하자면, 이러한 '도색 서적'에 대한 재판은 비단 여성작가만을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 영국 신사분들이 법정에 세운 '야한 책'의 실제 선례로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있다. 그 책 역시 음란함으로 미풍양속을 상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고, 이 책에 대해 비난한 '영국 신사'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내나 하인들이 이 책을 읽기를 원하십니까!'하고 외쳤다. 그러니 자신들이 얼만치 지저분하게 살던 겉은 점잖아야 하고, 아랫사람 단속하기는 버선발로 뛰어가 행했던 것이다. 아, 고매한 신사 여러분! 힘든 일 하셨습니다!


진정 나일 수 있는,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길을 찾아!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이 쓴 글은 일견 몽상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코렐은 바람피우는 남편을 죽이지 않고, 줄리아가 흠모하는 다아시는 2D 활자 남친으로 후속 편이 탄생하지 않은 채 완결을 맞이했고, 메리는 짝사랑 상대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보라, 그들의 소설 속 에고를 보라. '진짜 나'는, 남편을 증오하다 못해 죽여버리고 싶고, 짝사랑 상대와 속된 말 그 자체로 '붙어먹고 싶고', 진정 욕망하는 상대는 활자 인간이다. '진짜 나'는 영국 사회 규범에서 무척이나 어긋난 여성이다. 정숙한 여인이 아니고, 온화하고 인내하는 부인이 아니고, 현실 남자에는, 빌어먹을, '미스터 다아시'가 아니면 관심도 없다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존재다! 하지만 바이올렛과 안나의 대화에서 '추천서를 직접 써온' 안나가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기 때문에 써왔다'라고 대답한 것처럼,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연하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은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나는 '진짜 나'를 안다. 그것은 욕망으로 이루어졌고, 신사 분들의 욕망처럼 순결하지도 않고, 요조숙녀는 무슨! 신사분들에게 관심도 없다.


글을 써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소비는 쉽지만, 생산은 어렵다는 것을. 글 쓰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글을 써야만 한다! 글을 써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아무도 내가 보고 싶은 걸 쓰지 않으니까……. 글 쓰는 것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오로지 '아! 기어코!' 하는 탄식과 함께 열망과 욕망을 연료로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리는 것이다. 가장 처음 쓴 글은 그래서 욕망 덩어리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본 것이 뭉쳐진 결과물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을 사랑했고, 해리포터를 사랑했고, 여하튼 그가 목마른 사람처럼 받아들인 모든 미디어에게서 받은 영감이 부끄러울만치 선명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 괜찮다. 모든 글은 그렇게 시작했다. 글은 욕망과 광기의 자식이다. 생산과 창조는 어렵고, 모방과 소비는 쉽다. 뭐든 그렇다. 빵 하나 굽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어! 재미있겠다! 하고 뛰어든 사람조차 빵을 구우며 깨닫게 되는 것이다:아, 그냥 사 먹을 걸, XX…….


그러나 글 쓰는 것은 멋진 일이다. 욕망을 가진 인간은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다면 생산적인 인간이 된다. 욕망은 부정한 것이 아니다. 부정한 종류의 욕망이 존재할 뿐이다. 창조하는 인간이란 미친 짓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다. 예를 들자면 생명을 창조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거나……. 농담이다. 그러나 단지 글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하는 인간들, 요리하는 인간들, 무언가 만들어내는 인간들은 모두 창조하며 고뇌하고 스스로를 쥐어짜 내는 미친 인간들이다. 주먹으로 제 머리를 두드리고 몸을 둥글게 말고 한참 울고 나서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적으러 재빠르게 책상으로 달려가는 미친 인간들이다. 이 광기로 말미암아 풍요의 뿔이 유지되는 것이다. 글은 곧 영혼의 말이다. '크루엘라'에 '나는 여자, 내 고함을 들어라'라는 대사가 나온다. 헬렌 레디의 노래에서 따온 것으로, 그렇다, 안나의 고함을 들어라! 레드북은 결국 '내 고함을 들어라, 내가 여기에 있다, 내 글을 읽어라!'하고 안나가 외치는 뮤지컬이다. 안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뮤지컬이 완전히 끝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는다. 왜냐하면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드북'에서 붉은 조명은 공포와 불길함을 뜻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넘버에서 전환되는 붉은 조명은 '안나'가 단단해지는 순간을, 혼란 속에서 결심하는 과정을 비춘다. 붉은색은 음란함을 떠오르게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경고의 색이고, 투쟁과 생을 의미한다. 그러니 두려워하라. '안나'의 글은 끝나지 않는다. 생은 계속된다-소설은 죽지 않는다! 글에 담긴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 펜이 있다면 성을 지을 수 있다. 펜이 있다면 저항은 계속된다,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이 노래하듯이. 계속해서 글을 쓰고 또 쓰자, 나를 위하여, 그리고 타인을 위하여!


언젠가 글들이 문학이 될 수 있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게 성을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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