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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Dec 10. 2022

폭풍 속에서 왈츠를

<아네트>에 대한 감상과 해석

그래서,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며 한번쯤은 어떤 충동에 휩싸입니다. 그것은 곤경에 처할 때 발밑을 보아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이곳에서 추락할 때를 가정해 전두엽을 괴롭히는 행위이기도 하고 철저히 자멸적이고 자학적인 쾌감을 얻기 위해 희생자를 자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때로 이것은 스릴이 되기도 하고 우리를 완전히 파멸하게도 합니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파멸할테지만, 놀랍게도 이것을 우리는 모두 가졌으며 생에 한번쯤은 찾아와 삶을 지속하게 만듭니다. 바로 죽음에 이르는 충동입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두 가지 갈래로 나누었는데, 리비도란 곧 생의 에너지입니다. 그에게 인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하여금 작동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며 사랑을 하고 종족을 번식하도록 욕망하도록 유도하는 에로스와 죽음에 다다르는 본능을 가져 자기 파괴를 갈망하게 하는 타나토스가 인간의 영원한 일부로 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아네트>의 등장인물을 작동하게 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중심으로 영화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1. 타나토스


우리는 헨리 맥헨리를 가장 먼저 죽음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헨리 맥헨리'는 녹색 옷을 걸친 신의 유인원입니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고, 권투선수 같은 의상을 입고 등장합니다. 그가 무슨 말을 지껄여도 관객들은 웃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 역겹다는, 염세적인 반응에도 그의 말에 웃습니다. 마치 그가 그들을 위해 재주를 넘는 원숭이가 된 것처럼 무엇을 하건 크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기침을 해도 웃지요.


그의 상징색은 녹색으로, 그의 조명 아래에 있는 자들은 그에게 엔터테인먼트만을 바랍니다. 그는 '헨리'이고, '질식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릿광대이고 그들을 현실에게서 멀어져 웃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는 '죽이는 자'가 아니고, 가장 죽음에서 먼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감히 죽음에 관한 웃기지 않은 유머를 구사했을 때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꼈죠. (그와 별개로 그의 농담들은 형편없고 그 와중에 뻔하고 식상한 스탠드업 코미디 단골 소재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두를 웃겨야만 하는 그가 비소와 독을,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녹색을 상징색으로 가진다는 것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심연이 언제나 그의 삶에서 떠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염세적인 태도와 빈정거리는 유머를 구사하고 사람들에게 웃기를 종용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우울을 쇼로 소비합니다. 심지어는 쇼에서 심연에 대해 말할 때조차. 관객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코미디언이 되었느냐고 묻지만 헨리는 심연을 동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난 절대로... 

-심연을 바라보지 않지


헨리는 심연을 외면합니다. 죽음을 철저히 외면하고 두려워하지요. 문제의 시작입니다. 헨리는 죽음을 외면하기에, 심연에 대한 두려움 탓에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며 폭풍 속 배에서도 안과 춤을 추려 듭니다. 


폭풍 속에서의 왈츠


헨리의 심연을 보는 자세는 마지막까지 변화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끝에서 아네트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것 역시 심연을 보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당부입니다.


-아네트

-나의 아네트

-절대 저 아래 심연을 보면 안돼


프로이트는 타나토스를 하나의 중요한 리비도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헨리는 '동정'한다고 표현합니다. 심연을 보지 않는 것은 그 안의 나를 만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연을 보면 죽음으로 곤두박질치도 모르지만, 놀랍게도 심연은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연을 죽은 자가 고인 구덩이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대한 갈망은 눌러서는 안 되는 빨간 버튼처럼 보이긴 하지만, 누르기 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요.


그는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안전해졌다고 믿으나, 그의 몸에 걸친 녹색 옷은 심연과의 소통이 부재해 문제가 평생 그를 따라다니리라고 경고합니다. <아네트>에서 죽음은 녹색으로, 헨리가 살인할 때 녹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영장에서 저지른 살해 행위가 이루어지는 내내 수영장은 녹색으로 빛나지요. 죽음은 그와 언제나 함께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터널에서도, 그의 죄가 탄생하는 순간에도, 심지어 심플한 그림으로 그려진 로고-아네트의 머리칼에도 녹색이 포함됩니다.


아네트는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그는 부정할 수 없이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과 추락에 대한 욕망을 가졌습니다. 타나토스에 대한 욕망인데, 이것은 결국 그가 심연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무지로 인한 두려움에 평생 휘둘림을 뜻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죄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죽음의 죄인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손에 묻은 피-죄-를 지우려 애쓰는 대목과 유사합니다. 헨리의 얼굴에 어느 시점부터 떠오른 반점은 점점 선명해지고 커집니다. 그는 죽음의 죄를 감출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생을 좀먹음을 뜻합니다.


죽음을 연기하는 안:타나토스를 충족시키는 존재

다른 타나토스는 안입니다. 안은 매일 무대에서 죽습니다. 오페라 가수인 안은 카르멘을 연기하며, 나비부인의 쵸쵸상을 연기하며, 다양한 오페라 속에서 찔려 죽고 목 졸려 죽으며 자결하기도 합니다. 안은 현대인들의 타나토스를 대리만족시키는 존재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욕망, 그리고 자멸에 대한 욕망을 대신하여 안은 매일 죽습니다. 헨리의 살인 사실이 밝혀져 연행되는 시퀀스에서 사람들은 노래합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죽였으며, 우리의 종교였던 그녀는 이제 우릴 위해 죽을 수 없다고요.


죽음은 안식이기도 하며, 그들이 차마 누르지 못하는 붉은 버튼입니다. 죽음에 대한 충동과 욕망은 현대사회에서 터부시됩니다. 안은 그들의 충동을 충족시키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도록 해방시키는 존재입니다. 죽음의 행위를 재현하는 안이 죽은 후 사람들은 헨리를 이렇게 비난합니다. '우리를 경멸하던' 헨리.


헨리는 죽음을 욕망하는 이들을 경멸하던 것이 맞습니다. 그가 심연-죽음을 두려워하였고 매일 무대에서 죽는 안에게 박수를 보내는 자들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을 그들도 압니다. 그들은 오직 극장에 몰려들어서야 죽음에 대한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는데, 안이 정말로 죽음으로서 그들에겐 수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헨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심연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망쳤습니다.



2. 에로스

사랑 없는 삶은 얼마나 시시할까요? 영화에서 에로스는 표면적으로 나타납니다. 안과 헨리, 그리고 연주자의 삼각관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에로스의 전부가 섹스와 성애적인 사랑이 아니며, 이 영화에서는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됩니다.


영화는 레오 카락스의 등장과 레오 카락스의 딸의 등장으로 아주 초반부터 이 영화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힌트를 내어줍니다. 영화에 나타난 사랑은 성애적인 사랑 외에도 삶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아버지와 딸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전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도 딸과 어머니의 사랑에 다루었는데, <아네트>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레오 카락스의 딸에 대한 사랑의 자장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기엔 훌륭한 아버지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레오 카락스가 이 영화를 통해 딸에게 보내고자 한 메시지는 바로 '내가 세계 최고의 아버지는 아닐테지만 그래도 너의 아버지임이 내겐 의미가 깊단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네트에게 헨리는 좋은 아빠는 아니지만 아버지로 남고 싶어합니다. 그를 계속 사랑하고자 하지요.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널 사랑하면 안돼?

-안돼


아네트는 그의 사랑이 지속되는 것을 막습니다. 거부하고 분노하지요. 그것은 아네트를 사랑하는 일만이 헨리를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레오 카락스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홀로 딸을 키웁니다. 초반에 함께 출연한 딸입니다. 레오 카락스는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들고 헌정하며 자기의 두려움도 조금 담아 딸에게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아네트를 돌보던 지휘자이기도 하고 헨리였을지도 모르는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간절하고 어리석게 영원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헨리는 두 번이나 아네트와 이러한 대화를 반복합니다. 제발, 부디 너를 사랑하게 해 줘. 


-아빤 사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

-널 사랑하면 안 될까? 그럼 안 될까?

-아빤 사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

-널 사랑하면 안 될까? 아네트?

-그건 안 돼, 아빠

-슬프지만 그게 진실

-아빤 사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


사랑은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나, 헨리는 아네트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이것은 곧 삶에 대한 허락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붙이고, 그가 심연으로 곤두박질 치지 않도록 붙잡고 기나긴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허락입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영화이면서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에 삶을 살아가는 데에 인간의 구심점이 되어주는 모든 것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사람들은 아네트를 안의 딸, 안의 일부로 보았을 것 같은 것이 둘은 이름도 비슷하다

-한때 아네트처럼 누군가의 아들로만 살아서 자길 사랑할 줄도 모르나 싶다 이름 헨리 맥헨리는 헨리의 아들 헨리니까



3. 수단

감독은 아네트를 목각인형으로 출연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베이비 아네트로서 전세계를 떠돌며 공연을 하고 혹사당하던 아네트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는 인형처럼만 보이고, 언어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노래할 때만이 소리를 냅니다. 아네트는 영화 내내 자신의 두 발로 자유롭게 걷는 대신 물건처럼 들려다닙니다. 비행기를 타고 투어하는 내내 울지도 않지요.


그래서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네트가 거대한 무대에서 입을 열고 고발한 순간, 그리고 인간의 뼈와 살을 가진 실제 아이로 출연한 순간에 충격이 컸습니다. 우리는 헨리와 마찬가지로 거의 잊고 있었습니다-아네트가 독립된 한 명의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아빠나 지휘자, 스튜어디스, 어머니에게 들려서 다니거나 가방에 수하물처럼 태워졌을 때도 별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네트가 아버지가 살인자임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충격이 있었을 테지만 사실 우리는 아이들을 보통 이렇게 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편의를 위하여 자유의지가 지워지고 가만히, 혹은 얌전히 있어야만 합니다. 아이는 순하게 굴어야 하고 예의 바르며 어른들의 일은 조금도 몰라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순종하기를 바라고 딸린 수하물처럼 여기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리라고 여기는데, 아네트가 입을 연 순간부터 아네트의 존재를 관객뿐만 아니라 헨리도 깨달았고 아네트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아네트는 살인의 순간을 목격했고 자의식을 가졌으나 묵살당했습니다. 어머니처럼 재능을 가졌기에 착취당했고 아버지는 자신을 도구처럼 돈벌이에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네트를 안의 딸, 안의 일부로 보았을 것 같습니다. 둘의 이름은 안에게서 아네트가 갈라져 나온 것처럼 유사합니다. '작은 안, 어린 안, 죽지 않은 안, 자라면 자신들을 위하여 죽음을 재현할 또 하나의 안'으로 보았겠지요. '베이비 아네트'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그의 귀여움과 재능을 소비하고 자라면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아네트는 어머니에게도, 그를 살뜰히 돌보던 지휘자에게도 '아네트' 개인이 아닌 매개체였습니다. 그를 매개로 복수의 저주를 남기는 어머니, 그를 통해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과 슬픔을 잊으려는 어머니, 하필이면 재능을 남겨 자신의 작은 버전으로 살게 한 어머니와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잘 대해주던 지휘자까지 아네트를 온전히 아네트로 본 존재는 없습니다. 이토록 외롭고 괴로운 세계에서 아네트는 분노하고 사랑받기를 거부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르던, 필사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각오처럼 들리던 사랑 노래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안과 아네트처럼, 헨리는 한때 누군가의 아들로만 살아서 자길 사랑할 줄도 모르나 싶습니다. 그의 이름 '헨리 맥헨리'는 헨리의 아들 헨리라는 뜻인데 이 영화에서 온전한 어른은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영화의 시작부터 '아네트'를 체험했습니다. 영화의 시작을 떠올려보세요. 영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집중해주십시오. 노래나 웃음, 박수, 울음, 하품, 야유, 방귀는 부디 머릿속에서 해주십시오. 오직 머릿속에서만. 이제 침묵을 유지하시고 쇼가 끝날 때까지 숨을 멈춰주십시오. 숨 쉬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십시오. 감사합니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이미 아네트였던 것입니다. 통제 당한 아네트의 상황을 관객에게도 제시하는 것으로 감독은 이 영화를 시작했습니다. 레오 카락스의 죽음과 삶에 대한 시선을 관객은 직접 체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가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네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아이들은 때로 수단이 됩니다. 모범적인 사회인의 코스를 위한 수단이 되고, 자랑할 거리가 되고, 자신의 분신 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충족하게 하지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에블린과 조부 투바키처럼요.


옛날, 아이들은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동복은 갑갑한 코르셋과 발을 아프게 하는 남성용 구두의 축소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며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압니다. 비록 영화에서 아네트는 아이로 있을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했으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요. 아네트는 헨리에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을테고 밤에는 불도 켜지 않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헨리는 이것을 간절히 만류하는데, 아네트는 심연과 함께하겠다고 말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자기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것들을 해 주고 싶어하고, 헌신하며 자기만족을 얻기도 합니다. 사랑과 죽음은 양극단에서 우리를 잡아당기며 살게 만들지만,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번쯤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헨리가 그랬듯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 두려운 것, 혹은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많이 신경쓰고 욕망하는 대상에 대한 본능적 끌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가장 흉한 부분을 투영한 것이기에 터부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심연-죽음을 외면하고 살았으나 폭풍 속에서 안과 춤을 추던 순간의 헨리는 어쩌면 죽음을 앞둔 희열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허위매물인 포스터가 탄생한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 곧 심연-죽음을 목전에 두고 희열을 느끼는 것이기에. 그러나 이 어리석은 짓으로 헨리는 죽지 않았고 안이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단 한번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했으나 헨리는 심연에 대해 이야기하던 스탠딩 코미디쇼 씬에서처럼 죽음과 심연 자체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 살고 있고 더 잘 살기 위하여 죽어갑니다. 삶은 결국 폭풍 속에서 왈츠를 추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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