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찬 Aug 24. 2023

사회초년생 김바비 씨에게, 그레타 거윅이.

영화 <바비>는 사회초년생 여성을 위한 편지다



<바비>는 전형적인 여중여고여대 루트로 핑크빛 세계에 살다 최초로 쓰라리고 냉혹한 세계에 진입한 사회 초년생 김바비 씨의 이야기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싶겠지만, 사실이다. 여중여고여대 루트로 경쟁자도 여자, 리더도 여자, 마음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치열하게 싸우고 자신을 뽐내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안전한 핑크색 온실 속 멋지고 당당한 화초로 살다 별안간 졸업해 취업 시장이라는 리얼 월드로 나온 것이다.


김바비 씨는 여자들에게 익숙하다. 여대에서는 전형적인 생머리 찰랑이는 원피스 차림 학생이 사회적 투쟁에 힘쓰는 학생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그냥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 그곳에서는 '여학생'이라는 단어로 구별되지 않는다. 교수님들은 다수가 여자고, 해당 학교를 나와 돌아왔기 때문에 이 교정을 사랑한다. 김바비 씨에게 여자는 아군이자 선의의 경쟁자다.


그랬던 김바비 씨가 취준생이 되어 사회에 나왔다. 그러자 이게 무엇인가, 남자들은 그녀를 트로피쯤으로 여기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점수는 깎여 그녀보다 점수 낮은 남성 지원자들이 그 자리에 선다. 심지어 저녁 9시 뉴스에는 그것이 보도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김바비 씨는 여자만 우글거리던 세계에서 나오자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더 이상 자기가 아름답지 않은 것 같다.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셀룰라이트는 또 어떻고!


김바비 씨는 아, 대학원이나 가버릴까. 하고 주저앉고 싶어 하지만, 남녀공학을 나와 남초과를 졸업한 금오리아 씨와 취뽀 스터디를 했다.


김바비 씨는 더럽고 치사한 지원 비리 뉴스를 견뎌 두 가지 선택지에 놓인다. 대학교에 주저앉아, 쓰라린 사회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던 바로 그 때처럼 마침 입사동기들도 아는 얼굴에 익숙한 분위기의 작은 회사에 갈지, 아니면 금오리아 씨와 이를 갈던 치사한 면접들을 뚫고 기어코 더 넓고 높은 회사에 갈지.


물론 이것이 완벽히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레타 거윅이 한국 취준생을 그린 것도 아니고, 이것은 어디까지 예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히 안전하고 익숙한 세계를 떠나 최초로 쓰라린 현실 사회에 진입한 여자가 경험하는 허탈함을 그리고 있다. 이 탈력감, 무력감은 분명 젊은 여성들이 아는 종류다. 그나마 '남녀평등, 알파걸' 세대에서 부모님의 밑에서 사회의 징그러움은 잘 모르고 자라 취준생이 되어 남성 지원자 점수 가산점 따윌 위해 점수 깎여본 사회 초년생들의 느낌이 담긴 것이다.


바비는 페미니즘적 토이스토리이자 어른이 된 소녀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바비를 가지고 노는 소녀가 토이스토리에서도 등장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토이스토리 속 바비-주인 소녀보다 '토이스토리답게' 교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비>는 큰 흐름으로 보면 바비가 여성중심사회-바비 월드를 구하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그레타 거윅과 마고 로비가 여성 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한데, 바비로 상상놀이를 하던 소녀가 어른이 되어 존재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겪고 마는 우울함과 성장통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오프닝 씬의 유명한 오마주를 제외하고 봐도 바비에서는 명작들의 텍스트가 오마주 되었음이 잘 보인다. 특히 큰 틀은 <매트릭스>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그러하다.

본래라면 이 장면은 '네오'에게 '모피어스'가 빨간 약을 먹고 진짜 현실을 선택할지, 푸른 약을 먹고 이 안락함에 안주할지 묻는 장면이다. 그것을 '바비'식으로 뒤틀어 오마주한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바비에서 '하이힐'은 불편한 신발이 아니고 건강을 망치는 신발이 아니다. 본래 발꿈치를 들고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 바비들의 발에 맞게 창조된 편한 신발이다. 이곳에서는 족저근막염도 없고, 마모될 연골도 없으니까. 이곳의 의학을 보라. 플라스틱 파도에 뛰어들었다가 튕겨나온 켄을 치료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이 세계가 위험이 완전히 거세된 결백하게 안전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샌들은 반대다. 온종일 걷고 투쟁하는 진짜 세계에서 온 신발이다. 발꿈치가 땅에 닿고, 발이 평평하고, 온종일 걷고 또 걸으면 발꿈치가 옥신거리는 고통의 세계.



그레타 거윅은 의도적으로 영화를 바비 월드처럼 만들었다. 계단은 결코 내려가지 않고 날아 내려가며, 수영장과 바다는 물이 흐르지 않고 그 위에 설 수 있는 플라스틱 판이며 음식은 모두 플라스틱인 세계로.

이곳이 익사할 물도 불도 없으며 켄들의 전쟁에서조차 무기들이 죄다 장난감에, 싸움박질도 박진감 없이 시시하기만 한 안전한 세계임을 생각해보면 그레타 거윅이 그 세계에 맞춰 실제 세계의 고통을 거세해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전에 만든 세계들과 다른 점은 그레타 거윅이 충실히 '플라스틱-바비 월드 컬렉션'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거꾸로 가는 남자>에서 보여준 코미디와 결합한 신랄한 남성 위주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번 더 포장지를 두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장난감들의 싸움만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바비>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바비월드를 보며 느낀 감상을 생각하며 영화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가 여전히 바비월드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레타 거윅은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는 순간의 관객들을, 그리고 밖으로 나와 이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이들을 '글로리아'나 회사 임원들처럼 바비월드에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무서운 사실은, 우리가 이 거대한 핑크색 세계에서 나가는 입구를 여전히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그레타 거윅의 다른 영화에 비해 다소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레타 거윅은 우리를 플라스틱 냄새가 남은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게 놔두었다. 이것이 이상하다고 비웃거나, 켄들의 모습에 분노하고 이입하거나, 에스테틱으로 여기거나, 챌린지로 지나가는 모습들을 투명한 비닐 너머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레타 거윅이 미디어 속 과학자들처럼 우리를 매스를 쥔 채 낱낱히 살피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핑크색 플라스틱 세계에서 자신의 영화 속 바비처럼 걸어나오기를, 상자 밖으로 나와 진짜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이 영화에 비춘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들을 동경하고 사랑하던 천사가 자신의 날개를 버리고 인간이 된 것처럼, <바비>에서도 주인공 바비는 자신의 세계가 어디인지 선택하게 된다. 두 영화는 몹시 닮았다. 인간이 되기 위하여 관찰자 시점도, 인간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돌보며 마음을 읽는 능력도, 영원한 삶도 버린 천사와 아마 영원히 행복하고 핑크빛이며 늙지 않을 바비 월드를 버린 바비는 닮았다.


현실 세계의 여자들에게 바비 월드로 가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글로리아처럼 선뜻 그러마 할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출산 휴가를 쓰고 돌아오니 책상을 빼 버리는 일도, 마찬가지로 육아휴직을 쓴 남편에게 놀고 오니 좋겠다며 상사가 눈치 주는 바람에 부부가 나란히 착잡함을 느낄 일도, 입사 동기를 비롯해 한 직급 아래의 남직원이 자신과 비슷하게 월급을 받고 있었다는 일도 없을 테니까.

심지어는 바비를 창조한 회사마저 남자 직원뿐이며 '나는 당신 아내를 좋아하고, 당신은 당신 아내를 좋아하고, 그러니까 우린 같은 편이죠' 따위의 기적적인 논리로 자신과 여성은 거의 비슷하니 여성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논조로 우겨댄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이곳이다. 달아날 수 없다. 이곳이 우리의 세계이고, 플라스틱 세계에서 우리는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바비>는 결국 자아 찾기 영화인 동시에 '나'에 대해 직면하는 영화이고, 성장 영화이다.

그레타 거윅은 바로 이것으로 바비를 통해 여성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 세계는 때론 불합리하고, 조롱당하고, 바비가 처음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나타났을 때처럼 희롱당하고, 패배감을 느끼게 할 테지만 우리는 이 우울 속에서도 우리일 뿐이라고.


왜냐하면 바비는 바비고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켄은 그냥 켄이고 앨런은 언제나 앨런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죽을 힘을 다하지 않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