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what may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사랑하리라 , 캐나다

by ACEV

한국과는 지구 반 바퀴나 떨어진 이곳에 온 지 벌써 8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바깥 풍경도 어느덧 하늘 가득 진하게 베어든 묵직한 잿빛으로 바뀌는 중이었고, 혼자 무엇이든 잘해 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날이 갈수록 그 무게를 더해 나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었다. 학기 초반 팀 리더로 강의실을 휘젓고 다닐 정도로 에너지 넘치던 나는, 그 존재의 경계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의 쓰나미는 저 멀리 한국에 더 큰 규모로 상륙했다. 끝이 없는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던 걱정은 곧 시작하는 새 학기를 이어 나가야 할지, 여기서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지경까지 나를 몰아갔다. 국경 넘어 비자까지 바꿔가며 어렵게 입학한 학교지만,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외면하고 나 혼자만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손바닥만한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늘 “쓸데없는 걱정 하지마라”로 끝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걱정은 눈처럼 쌓여만 갔다.


새 학기가 시작하려면 한 달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고민만 하고 있다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탈 것만 같았다. 이제 막 시작한 새로운 여정에 바로 마침표를 찍어버린다면 큰 후회의 폭풍이 쉴 틈 없이 몰아칠 것이다. 침착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배낭을 챙겨 공항으로 갔다.


“바로 구입할 수 있는 항공편이 뭐죠…?”


한적한 공항의 데스크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에게 어깨에 맨 배낭을 스윽 보여주며 안심시킨 후, 대기시간이 가장 짧은 항공편을 찾았다. 다음 해 여름 여동생을 초대해 여행하려고 차곡차곡 모았던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렇게 토론토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학교로 향하는 스카이트레인에서, 집 생각이 나거나 기분이 처질 때, 혹은 진중하게 마음을 눌러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늘 손바닥만 한 아이팟을 켰다. 높낮이가 다른 갖가지 소리로 가득 찬 이륙 직전의 비행기 안에서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 음악이 많았던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될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때로는 가사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잠시 머물다 갔다. 비행기의 진동만큼이나 불안했던 마음에 음표 하나하나가 찾아와 위로와 안도감을 무심하게 놔두고 갔다.


“그런데… 나…잘 곳이 없는걸…”


무작정 토론토로 향하며 건 전화기 속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방 한켠을 내어준 친구네에서 한동안 신세를 졌다. 산책을 하기도, 근처 도서관에 들러 책을 보기도 하며 이 나라에 온 후 처음으로 소나타 2악장과도 같은 정적이고 차분한 시간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마지막이 될, 혹은 여기에 남기로 결정하더라도 뜻깊은 여행이 될 이 시간을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워보기로 결심했다. 꺼지지 않는 불을 보러 오타와로, 프랑스의 색채로 가득 찬 퀘벡으로, 그냥 이름에 끌려 몬트리올로, 빨간머리 앤을 만나러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그렇게, 생각 나는대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발걸음을 이어나가자.




그날은 시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버스를 탄 탓에 어두컴컴한 새벽 퀘벡에 도착했다. 택시를 부르기도, 터미널 옆 유일하게 불이 켜진 술집에 들어가기에도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흐릿한 가로등을 이정표 삼아 언덕 위에 위치한 올드시티로 걸어 올라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공원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집만 한 배낭을 친구 삼아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순간 차가워진 공기 때문인지, 적막뿐인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오싹함 때문인지 몸이 살짝 떨렸다.


‘쫄지 마’

‘아무렇지도 않은 걸’


‘설마 무서운 거야?’

‘그럴 리가. 이것 봐. 여기까지 왔잖아.’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 …….’


몸이 떨리는 건 추워서도,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거울처럼 나의 처지를 비추며 마음속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정답 없는 질문 때문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아직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질문에서 도망치고 싶어 급하게 떠나온 여행이었고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쇳덩이로 된 추가 마음을 계속 가라앉히기 전에 멈춰야 했다.


여행 내내 몸의 일부분처럼 함께 했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복잡한 마음을 영화 속 장면으로 바꿔준다. 성공이다. 잿빛 하늘 아래 붉은빛을 내며 천천히 돌아가는 풍차. 정열적이며 시리도록 차가운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던 영화 <물랑루즈>의 장면과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Come what may>.


'Come what may 무슨 일이 있어도
Come what may 무슨 일이 있어도
I will love you until my dying day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그래, 주인공 새틴과 크리스티안이 사랑을 확인하며 부르던 노래였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던 두 젊은이의 사랑과 그들 앞에 놓인 비극.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았던 두 주인공의 노래를 가사를 줄줄 외울 정도로 자주 들었었는데…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안 해가 천천히 떠오르며 주변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Suddenly the world seems such a perfect place 이제 이 세상이 너무나도 완벽해 보여요’


하늘이 점점 밝아진다.


‘Suddenly it moves with such a perfect grace 이제 이 세상이 너무나도 평안해 보여요’


초록으로 덮인 평원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Suddenly my life doesn't seem such a waste 이젠 내 인생이 목표 없이 흘러가고있다는 생각을 하지않아요.’


탁 트인 도시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동화 속 같은 곳이었다.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을까. 겨우 잠재웠던 마음속 진자가 다시금 운동을 시작했다. 쿵쿵거리는 떨림은 종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And there's no mountain too high, no river too wide

Sing out this song and I'll be there by your side

Storm clouds may gather and stars may go by

But I love you, until the end of time’


새틴이 크리스티안을 향해 부르던 목소리가 갑자기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노래 가사처럼 오르지 못할 산이 어디 있으며 건너지 못할 강이 어디 있을까. 먹구름이 끼고 별이 사라진다 해도 나만 도망치지 않고 잘 버틴다면, 두려움과 혼란으로 떨리는 일상이 아닌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일상을 다시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은 더 용기 내 해 봐도 되지 않을까. Come what may, 사랑 노래가 갑자기 나를 향한 위로의 주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