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두부 탐험기

아무튼, 공간

by ACEV

어수선하고 조금은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왱왱거리나 장면은 암전된 듯이 새까만 기억의 조각이 하나 있다. 폭신한 소파 가장자리에 뉘어져 한참을 기대어 있는듯한 느낌이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려 할 때마다 귀 근처로 시끄러운 소리가 맴돌아 단잠을 방해했다. 신호위반 차에 치여 깔렸다 겨우 꺼내져 병원으로 실려 가던 날의 장면이었다. 잠시 사라진 소리와 온도의 기억은 차가운 무언가가 온몸과 연결되면서 다시금 이어졌다. 여전히 보이진 않지만 들리는 장면.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던 공간, 너무나도 기다렸던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가까워짐을 끝으로 그 장면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그날부터 꽤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여섯 살의 말랑한 몸 위로 지나가 버린 택시 바퀴 때문에, 락스에 담긴 커다란 두부 같은 공간 구석구석을 다니며 할 수 있는 검사는 거의 다 한 듯하다. 검사를 기다리는 지루함과 자주 바늘이 빠지는 바람에 침대보를 갈아야 했던 번거로움을 제외하고는 병원 생활은 퍽 재미있는 것들 투성이었다. 넝쿨 같은 선에 갇혀 피라미드 속의 미라처럼 움직이지 못할 때는 매일 다른 친구들과 손님들이 와서는 맛있는 것과 선물을 주고 갔다. 불편한 침대와 좋지 못한 냄새가 나는, 맘에 썩 드는 공간은 아니지만 처음 가져본 나만의 방에선 하루하루가 파티였다. 아빠가 퇴근해서 오는 저녁 시간이면 ‘이야기 이어가기’ 게임으로 그 좁은 공간엔 거대한 상상 속 장면들이 둥둥 떠다녔다. 누워있는 침대가 움직이는 나무 그네가 되고, 팔과 연결된 긴 튜브 속엔 마법의 물약이 들어 있어 하늘을 날기도, 적을 무찌르기도 했다.


침대를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게 되자 하얀 두부의 공간을 매일 탐험하는 임무가 스스로에게 주어졌다. 엄마가 자리를 잠시 비울 때면 서랍에 모아두었던 과자를 손 한가득 들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과자 맛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나눠주기도 하고, 자주 링거팩을 갈아주는 간호사 선생님에게는 아껴두었던 사탕을 건네며 다음번엔 다른 침대 사람들처럼 예쁜 색의 팩으로 바꿔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링거가 빠져 퉁퉁 부은 손으로 청소 이모를 찾아다니며 왕 주먹이 되었다며 자랑하기도 하고, 젖은 침대보를 갈아달라고 말하러 가다가 비품실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엄마 아빠와 간호사 선생님들과 의도치 않게 숨바꼭질하는 일도 있었다.


조금은 정이 든 공간과 사람들을 떠나는 날, 세상이 떠나가라 꺼이꺼이 울었다. 익숙해진 그곳을 떠나는 아쉬움보다는 집으로 돌아가면 여동생과 침대를 같이 써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병원을 방문할 때면 집과는 또 다른 내 공간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반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간호사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청소 이모를 찾아가 집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에서 그 기억들이 희미해질 때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의 이야기가 빼곡한 엄마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엄마의 일기는 사고 나던 날과 그 이후 며칠이 빠진 것 말고는 긴 병원 생활의 장면이 담겨있었다. 사고로 다친 나에 대한 걱정, 사죄보다 보험 없이 차를 운전하며 자녀 셋을 키우느라 돈이 없다고만 하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 긴 병원 생활에 서로 지치지 않기 위해 아빠와 했던 다짐, 병원에 있느라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 황당하리만치 제집인 마냥 생활하는 나에 대한 안도감 등. 나에겐 재미있고 즐거운 일투성이였던 병원에서의 시간이 엄마에겐 꽤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이제는 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부서지고 무너질 수 있었던 하얀 두부의 공간에서 흔들리지 않게 한 것은,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내색 없이 든든히 서서 함께 버티고 있었던 엄마 아빠의 단단함인걸. 우연히 떠올린 기억 속 공간을 생각하고 회상하고 건져내면서 다시금 발견하게 된 같은 공간에서의 나의 시간, 그리고 조금은 다른 엄마의 시간. 이 먹먹함이 이번엔 조금 오래 지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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