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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Aug 25. 2021

한국 VS 중국 in 러시아

자존심을 건 '워크래프트3'대결

어느 날 옆방 중국인 친구들이 커다란 모니터와 컴퓨터 여러 대를 사 가지고 왔다. 긴 책상을 벽면에 일자로 붙여 데스크톱 컴퓨터와 모니터를 설치해 놓았고 PC방에서나 볼법한 게임용 의자까지 구비하여 기숙사를 PC방처럼 세팅했다. 당시 '워크래프트3'라는 게임이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인기였다.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유명한 '스타크래프트'와 게임 형태는 비슷했지만 영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게임 방식과 복잡한 컨트롤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학창 시절 '워크래프트3'를 즐겨했다. 소설 <반지의 제왕>처럼 넓은 세계관과 판타지 스토리로 구성된 여러 종족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인간의 손에서 자라게 된 오크족 리더 '쓰랄'의 스토리가 가장 흥미로웠다. 게임은 비록 3인칭 시점이지만 장대한 이야기를 직접 플레이하면 마치 게임 속 영웅이 된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나만의 특별한 영웅과 부대를 창설해 전쟁을 이끌어 승리하는 것이 이 게임에 묘미였다. 나는 화려한 컨트롤은 못하지만 변칙적이고 유닛 상성에 잘 맞춘 전략을 갖추어 나만의 전략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오크족 리더 쓰랄의 게임 플레이 화면


내 룸메이트 쳉도 '워크래프트3'를 좋아하고 즐겨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옷도 벗지 않은 체 외투 그대로를 입고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할 정도로 좋아했는데 덕분에 '워크래프트3'와 관련된 이야기를 쳉과 주고받으며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쳉은 나와 게임 대결을 너무 하고 싶어 했다. 쳉은 나쯤은 쉽게 이길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했고 나에게 계속 도전장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쳉에게 러시아어 공부를 위해 게임을 할 수 없다며 대결을 회피했는데 어느 날 "너 워크래프트 정말 못하는구나"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공부하러 러시아까지 왔는데 여기서 게임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쳉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 위해 나는 대결을 수락했다. 뭘 하든 중국 친구들에게는 절대지고싶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어 실력에 있어서는 중국인 친구들보다 무조건 월등하고 싶었고 운동과 게임까지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이번 대결은 한국과 중국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기도 하니 무조건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나는 쳉에게 지금 당장 붙자고 했다. 나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대결을 하려고 보니 내 노트북은 미니 넷북으로 게임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는데 10인치 정도 되는 모니터와 미니 키보드, 초소형 마우스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자유로운 게임 컨트롤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변명하며 대결을 피할 수는 없었고 불가능한 환경을 뛰어넘어 진정한 컨트롤로 실력의 격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고 다짐했다.


당시 사용하던 넷북 Eee PC


서둘러 게임을 다운로드하고 손도 풀 겸 컴퓨터 AI와 대결을 했다. 한국을 떠난 뒤로 러시아어 공부에만 매달렸던 터라 역시나 게임 컨트롤이 어색했다. 작은 키보드와 마우스는 자꾸만 엉뚱한 키를 누르게 만들었고 10인치 모니터를 집중해서 쳐다보니 눈이 너무도 아팠다. 공부하던 모든 집중력을 잠시 게임으로 돌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손가락을 열심히 풀었다.

 

'워크래프트3'에서는 치열한 두뇌싸움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전략과 병력을 빠르게 분석하여 유닛 상성에 맞춘 병력을 구성해 싸워야 한다. 기지의 방어선을 잘 구축하고 자원을 효율성 있게 배정하여 유닛을 생산해야 한다. 무엇보다 영웅을 중심으로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영웅의 선택과 성장도 반드시 챙겨야 한다.


드디어 쳉과의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됐다. 쳉은 휴먼이라는 종족을 선택했고 나는 언데드라는 종족을 선택했다. 언데드는 즐겨하던 종족으로 확실한 나만의 승리 전략도 가지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라는 영웅을 필두로 내세워 뱀파이어 영웅과 구울을 주 유닛으로 사용하여 빠르게 치고 빠지는 나만의 운용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서 자신만만해하던 쳉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몇 번의 공격으로 쳉의 기지는 이미 쑥대밭이 되었고 쳉의 영웅은 매번 함정에 걸려들어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쳉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쳉은 이런저런 변명을 하며 나에게 계속 대전을 요청했고 결국 3판의 게임 전부 승리했다. 짜릿한 승리를 맛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쳉의 기분이 상할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옆방 중국인 친구들이 나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대결 요청에 놀라 쳉에게 물어보니 나와 대결했던 이야기를 듣고 복수를 하겠다며 나에게 대결을 제안을 한 것이었다. 쳉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잘하는 친구들이라며 내 실력을 능가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자존심에 자꾸 생체기를 내는 쳉의 말 한마디에 옆방 중국인 친구들의 코까지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게임 플레이 화면


정황상 이번 상대는 중간 보스급이다. 학교도 가지 않고 밤낮 기숙사 방에서 게임만 하는 친구들이다. 거기다 컴퓨터 장비는 프로 게이머들이나 사용할 법한 것들로 전부 세팅해 두었다. 보통 이 친구들은 새벽 내내 게임을 하고 아침에 잠을 잘 정도로 게임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친구들이었다. 이러니 분명 쳉보다는 실력이 월등할 것이다. 이번에도 컴퓨터 사양과 같은 변명 따윈 하지 않고 머리와 실력으로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살짝 긴장이 됐지만 쳉과의 대결 이후 승리에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상대는 총 2명으로 각각 3전 2승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첫 번째 게임에서 나는 가장 잘하는 종족을 선택했다. 오크라는 종족으로 강한 영웅과 근접 유닛들의 밸런스가 좋은 종족이었다. 박빙의 매치로 예상했던 대결은 의외로 금방 끝났다. 옆방 친구는 분명 쳉보다 잘하긴 했지만 내 상대가 되진 못했다. 유닛 컨트롤에 있어서는 실력 차이가 분명했고 영웅 컨트롤도 아직 미숙했다. 상대방의 실력을 파악하니 다음 게임에서 이미 전략과 패턴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보다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두 번째 게임에서는 스스로에게 핸디캡을 주어 약하다고 알려진 유닛들과 영웅을 사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상성과 반대되는 유닛들을 사용하여 오직 컨트롤로 승리할 계획이었다. 약하다고 알려진 영웅과 유닛으로 승리한다면 분명한 실력차를 증명하는 셈이니 더더욱 해보고 싶었다.


두 번째 게임도 역시 내 승리였다. 바로 이어 다음 중국인 친구도 나와 대결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중국인 친구들은 내 게임 실력을 극찬했다. 그렇게 중국인 친구들과의 대결은 마무리되었는데 갑자기 옆방 친구는 뻬쩨르에서 가장 잘하는 중국인 친구와 대결하는 것을 제안해왔다. 솔직히 이번 대결 제안은 많이 부담스러웠다. 보스 몬스터를 한 단계씩 처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러시아 뻬쩨르에 있는 중국인 친구들 중 가장 잘한다면 분명 프로게이머와 버금가는 실력을 갖고 있을 것이고 혹시나 지게 된다면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기분 나쁜 패배로 계속 되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대전을 거절했다. 그러자 중국 친구들은 내 실력은 중국에게 안된다며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대결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뻬쩨르에서 제일 잘하는 중국인 친구가 옆방으로 왔다. 이번에는 잔칫집 마냥 엄청난 구경꾼들이 왔다. 그에 비해 우리 방에는 달랑 나 혼자 앉아 작은 노트북으로 게임을 준비했다. 책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노트북만 올려두었다.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 나는 초긴장 모드가 되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치 유명 게임 대회에 참여하여 결승전을 치르는듯한 분위기였다. 손에는 땀으로 가득 찼다. 이번에 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나라에 큰 망신이 될 것 같아 부담은 더 가중되었다. 옆방에서는 친구들끼리 큰소리로 기합도 넣고 '파이팅!!' 하며 중국어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외쳐댔다.


나는 나이트 엘프라는 종족을 선택하여 변칙적인 플레이를 준비했다. 아처라는 궁수 유닛을 활용하여 지상 유닛으로 활용하다 히포그리프라는 거대한 새에 태워 공중 유닛으로 변경하는 눈속임하는 전략을 준비했다. 지금껏 어디서도 보지 못한 플레이 방식일 테니 상대는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이번 상대는 지금껏 상대했던 친구들과는 다르게 좋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유닛 상성과 컨트롤을 잘 운용했고 영웅의 컨트롤도 상당한 수준으로 잘했다. 승부는 거의 박빙이었다. 다행히 내가 준비한 변칙적 전략에 말려들어 첫 번째 경기는 이길 수 있었다.


바로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게임을 관람하는 중국인 친구들도 흥분한 나머지 계속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마치 권투 경기의 감독이 된 것처럼 참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잘하던 중국인 친구도 무언가 쫓기는 듯 게임을 플레이하며 내 전략에 계속 걸려들었다. 한판 지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없는 듯 보였다.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을 하고 도망치면 끝까지 따라왔다. 덕분에 적 병력은 항상 분산되었고 나는 이것을 이용하여 적 영웅과 병력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뻬쩨르에서 제일 잘하는 중국 친구와의 대결에서도 완벽하게 승리했다.


쳉의 말 한마디에 어쩔 수 없이 시작된 대결이 이렇게 커질지 몰랐다. 지금도 종종 '워크래프트3'를 할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약간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중국 친구들과의 경기에서 이겼을 때마다 중국인 친구들에게 "정말 좋은 플레이였다. 덕분에 즐겁게 했다"라는 말 한마디 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승리하면 패배하는 사람도 있는 법인데 돌아보지 못했던 게 아쉽다. 그렇게 좋은 우정을 쌓을 수도 있었겠지만 쓸데없는 자존심만 너무 내세웠던 것 같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무조건 이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다. "너 정말 잘한다! 덕분에 즐겁게 게임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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