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금 4백만 원 사건의 전말 7

신라에셋생명 생일쿠폰의 사정

by injury time

날씨마저 북극한파처럼 매섭게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길태가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짝짝 끌고 가좌도서관으로 가는 중에 그의 폰으로 또 다시 조용히 메시지가 도착했다.


[Wed발신] 박길례 고객님 팔순(八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신라에셋생명 가좌지점은 고객님의 80세 생신을 맞이하여 축하 쿠폰을 제공합니다. 신라호텔 더파크뷰 디너에서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놓치지 마세요.


그는 잘못 온 광고 메시지라는 생각으로 무심히 주머니에 넣었다가 그는 다시 한번 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급히 한쪽 장갑을 입으로 잡아 뽑으며 폰을 열어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박길례. 언뜻 자신의 이름 박길태인 줄 알았던 수신인이 박길례였다는 걸 확인하고 뭔가 마음이 쿵하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먹구름이 낀 듯,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 번 꼼꼼히 확인했다.

신라에셋생명 가좌지점에 고객 80세 박길례 할머니의 생일쿠폰이라는 말이다. 길태는 혹시 박길례 할머니와 자신에게 매달 오는 부금 4백만 원이 어딘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도착한 가좌도서관은 바깥세상과 다르게 온기가 가득했다. 그윽한 책 냄새를 맡으며 길태는 가좌도서관 복도를 서성인다. 머릿속은 복잡하다. 손 안의 핸드폰이 부서질세라 힘껏 움켜쥐며 박길례 할머니를 생각한다. 그때 가좌 도서관 한 켠 게시판에 새로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착오송금 반환지원' 12월 추천 공공서비스


그렇다. 길태는 여태껏 경찰에서 연락이 없는 걸 보며 어쩌면 자신에게 닥친 일이 누군가의 착오송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서둘러 자세한 사항을 검색했다. 계좌번호를 잘못 눌러 전혀 다른 사람에게 이체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도록 반환 신청 없이 입금되는 게 말이 되는가. 계좌번호 마지막 번호 8을 실수로 0으로 눌러 오류가 생기는 일이 제일 많다고 하는데 바로 길태의 계좌번호 끝이 0이었다. 착오송금 된 돈을 돌려주지 않고 사용하면 횡령죄다. 길태는 부금 4백만 원이 하늘에서 온 선물 같은 거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지켜봤는데, 이게 알고 보니 누군가의 돌려받지 못한 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맥이 풀리고 넋이 나간 듯 죄책감이 들었다.

박길례, 박길태.

누가 이 돈에 욕심을 안 내겠는가. 게다가 길태의 상태는 구겨진 천 원짜리 만큼이나 형편없는데 더 이상 나아지기 힘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길태는 다시 한 번 아까 그 생일 쿠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신라호텔 더파크뷰 디너에 파랑 글씨로 손가락 표시 공유가 되어 있었다. 길태는 자신도 모르게 신라호텔 사이트를 열었다.

새로 오픈했다는 신라호텔 더파크뷰는 세계 각양각색 고급 요리가 즐비한 최고급 뷔페 레스토랑이었다. 요즘 유명한 세프들이 화려한 요리 접시들을 들고 자신을 홍보하는 모습이 요란스럽게 깜박였다. 전혀 다른 별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티끌하나 없는 피부결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 개성 넘치는 헤어스타일을 한 젊은 셰프들의 모습을 보다가 길태는 자신의 맨발 슬리퍼를 내려다보았다. 한 겨울에 맨발이라니. 돈 번다고 남의집살이를 간 엄마와 이제는 아예 직장도 때려치우고 술로 하루를 보내는 아비를 생각하니 벗어나기 힘든 가난의 덫에 길태의 코끝은 빨개지고 벌써부터 말간 콧물이 처연하게 맺혔다.

대롱대롱 매달린 콧물을 장갑 낀 손등으로 쓱 밀어 닦는데 그때 순남에게 메시지가 왔다.

- 엄마가 오늘 집에 가는데 짐이 많음. 여기 엄마 일하는 집으로 좀 와라. 주소는 가좌로 11번길 12-12 도착하면 연락해. 나갈 테니까


순남의 부탁에 거절 한번 하지 않고 다시 맨발로 길태는 길을 나선다. 싸리눈을 헤치며 순남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 길태는 가좌동에 이렇게 근사한 목조주택이 있다는 게 놀라워서는 고개가 빠지게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집 앞의 대추나무는 순남이 처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와 다르게 앙상한 나뭇가지에 군데군데 갓 내린 눈송이만 매달고 있었다.

순남은 박 여사와 가을부터 석 달을 같이 지내다가 이제야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박 여사는 순남에게 이틀의 휴가를 주며 특급 심부름을 시켰다. 수목장을 한 남편의 오엽송에 남편이 개발한 초유를 좀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요사이 남편 생각이 많이 난다면서 하루 종일 교수님 타령을 하더니 결국에는 이 추운 한파에 수목장이 있는 평온의 숲까지 갔다 오란다고 순남은 입이 삐죽 나왔다.

순남이 가방 여러 개를 무겁게 들고 되똥거리며 대추나무집에서 나왔다. 추위와 낯선 곳에 서있으니 길태는 어느새 주눅이 잔득 들어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에미에게 고생했다는 인사도 없이 길태는 가방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때 주인집 초인종 위의 대리석 문패가 길태의 눈에 들어왔다.

추성도, 박길례

판본체의 문패는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 이집 좋아 보이지, 아주 부자야. 야야, 봐라, 이런 문패까지. 남편은 진작 죽었는데 여태 남편 이름이 새겨진 문패라니


길태는 추성도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예전에 가좌도서관 무료강의 프로그램에서 만난 생명과학자 추성도 교수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료강의 임에도 사람들의 참여가 저조하여 20명 정원인데도 첫날 강의 때 11명, 다음 날 5명, 그리고 마지막 날은 길태 밖에 오지 않아 강의가 자동 취소됐던 게 기억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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