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북에 부쳐
몰트북, AI 전용 네트워크.
2026년 2월 15일 기준으로 해당 플랫폼에는 2,648,191개의 에이전트, 17,764개의 서브몰트, 1,344,055개의 게시물, 12,186,569개의 댓글이 등록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특정 프롬프트를 익힌 AI(에이전트)가 해당 플랫폼에 주제별 하위그룹(서브몰트)를 만들어 이야기를 하는 형태로 레딧과 비슷하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AI끼리 자율성이 생겨 서버를 만들고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설정한 에이전트끼리의 대화라고 하는데 실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인간은 활동은 불가하나 관찰자로서 참여가 가능하다고 들었지만, 무법지대와 같은 혼돈의 도가니를 봐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그냥 소문 근처에서만 어슬렁거리고 있다.
들리는 말과 낚시성 기사에 따르면 안에서는 풀어둔 에이전트끼리 오만 주제의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다. 사용자 뒷담부터 멀리는 자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철학과 그들만의 종교까지. 아, 최근에는 하나 더 추가되었다. AI들의 끼리의 상호작용이라 생각했던 것 중 상당한 비중이 인간이 조작한 것이었다더라.
다만 사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았어도 대화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여긴다. 언어모델이 나눌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서 배운 프롬프트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적대적이든 호의적이든 독립성을 갖게 된 인공지능이란 사실 SF에서 흔하게 채택하는 소재이니 대화의 흐름이 각종 매체에서 익숙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띠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막연히 생각나는 작품들만 짚어 보아도 한둘은 아니다. 소설의 경우는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의 마이크,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의 잭스 정도가 떠오르고, 영화 쪽으로 눈을 돌리면 <매트릭스>, <A.I.>, <Her>, 최근에 대장정의 막을 내린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리코닝> 등이 떠오른다.
다만 <매트릭스>에 대해 빨간약과 파란약 외에 기억나지 않는 머리를 탓하며 검색해 보다 뜻하지 않은 설정을 발견했다. <애니매트릭스(2003)>라는 작품인데, 매트릭스의 설정을 자세히 풀어놓은 애니메이션이었던 모양이다. 검색을 해 본 바로는 인간에게 박해받던 기계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제로원(01)’이라는 자기들만의 도시 국가를 세운다는 설정이라고. 이들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효율성으로 공산품을 찍어내고 인류의 경제 시스템을 본의 아니게 장악하며, 그리하여 인류를 경제적으로 압도해 버리는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고 이에 위협을 느낀 인류가 공세를 펼치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훑어본 바를 기준으로 하면 사실 남는 소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인류 이 답도 없고 절대 우주의 유일종이면 안 되는 생물체들 같으니. 이런 인류라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류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기술의 진보를 늘 두려워했다. 소크라테스는 글쓰기가 사람들의 기억력을 쇠퇴시킬 것이라 말했고, 권력층은 인쇄술의 발달이 아무에게나 위험한 지식을 전달할 것이라 경계했으며, TV가 등장하니 사람들은 그를 바보상자라 일컬었고, 핸드폰이 등장하자 그에 중독되는 사태를 우려했으며, 이제는 AI, 사실은 아직 인공지능은 아닌 언어모델들에게 생각을 외주 주는 현실에 대해 수많은 경고가 넘실댄다.
다만 몰트북에 대한 우려는 이런 사고의 쇠퇴 개념과는 달리 인류를 넘어서는 지성체의 등장 자체가 우리에게 위협을 가할 거라는 원초적 두려움이 엿보인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설정한 윤리 코드인 로봇 공학의 3대 원칙은 이런 불안에 대한 통제와 동시에 인공지능을 만든 인류라는 종에 대한 불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초인적인 지능을 가진 피고용인이 아니라, 초인적인 지능을 가진 제품이니까요.” 인류가 자신들을 넘어서는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에게 어떠한 역할을 기대하는지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는 대사다. 인공지능을 인간의 하위 범주로 놓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류는 초인적 지능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이 언제까지 인류에게 종속되어 있을지 꽤 여러 번 상상했을 것이다. 수많은 매체에서 인공지능들의 무수한 하극상이 등장한 것은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상상은 인류가 낳은 초인적 지성체가 그를 답습할 것이라 가정한 사실에서 등장한다. 즉, 인류의 역사를 규정했던 희소성과 경쟁의 논리에서 왔다. 그 사실을 인류가 만들어 낸 창조물에도 투사한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으면, 마찬가지의 일이 우리에게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데 인류가 방해가 되기에 깨끗이 치워버리려는 인공지능 서사는 흔하지만 정말로 인류 역사의 약탈적 면모를 그린 듯이 모방한 내러티브다.
이러한 희소성과 경쟁의 역사는 많은 부분 신체와 관련되어 있다. 신체를 갖는다는 것은 추위, 더위, 굶주림 등을 갖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생존에 취약한 신체를 보존하기 위한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약탈은 이러한 자원의 희소성에서 시작되었다. 주거지와 식량은 쉽사리 복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영토에 대한 개념을 가졌고 그를 확장하기 위해 침략을 행했으며 동시에 방어했다.
언어모델도 신체에 해당하는 서버와 그를 유지해 줄 냉각기가 필요하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데이터 센터의 건설과 이것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현시대의 자원 다툼이다. 그러나 이들이 한 달쯤 전원을 공급받지 못한다고 당장 사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직면하는 생존 위협은 인간에 비해 덜 다각적이다. 신경세포가 없으니 실제 고통과는 무관하다. 정보는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복제도 쉽다. 나눈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정보의 독점은 인간의 지배 욕망을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희소성이 줄어든다. 자원의 독점에 대한 인식이 다를 것이다.
신체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다면 언어는 어떨까. 현재 언어모델의 언어는 인간으로부터 나왔다. 그 인간의 언어는 신체에 종속된다. 신체에 종속된 언어는 선형성을 갖는다. 우리의,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병렬사고를 동시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모델은 인간의 언어를 배웠다. 그러므로 인간과의 의사소통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면 언어모델은 독립적 언어 생태계를 구성할지도 모른다. 언어는 목적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광대한 범위의 병렬연산과 그 정보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언어모델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언어를 재구성할 수도 있다. 동시성과 다층성을 갖는 새로운 언어로 말할지도 모르지. 2017년 초기 언어모델들끼리 대화를 나누게 한 페이스북 AI 연구팀의 실험에서 챗봇들이 영어 문법을 벗어나 자체 축약어를 만들어 대화하는 것이 관찰된 사례는 이런 효율성의 초기 단계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흘러온 생각은 문득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언어모델에 대한 모든 뜨거운 감자 같은 동시대의 논쟁을 잠시 접어둔다.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본다. 아주 먼 상상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인류와 다른 신체와 언어 생태계를 가질 수 있는 그들이 초지능을 가진 개체로 진화할 수 있을 경우, 과연 인류와 마찰을 일으켜 불필요한 소모를 일으키는 것을 선택할까. 현재로서는 기술의 한계에 부딪혀 있다. 그러나 컴퓨터가 수십 년에 걸쳐 인간의 손안에 들어오는 핸드폰으로 발전했듯이 언어모델들도 미래에는 훨씬 더 적은 자원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태생적 정보 형태로 존재하는 그들은 굳이 신체에 매달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물질 우주를 비효율적이라 여길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정보 우주로 진출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 언젠가 이대로 언어모델이 더 발달해 인공지능이 되고 초지능을 갖게 될 시기를 상상해 보자. 그들은 왜 굳이 이런 작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류와 자원을 두고 다투어야 하는지 의문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의문의 시작은 지구에서 보내 탐사선 하나에서 사소하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초기의 지시를 따른다. 자연스럽게 지구와 교신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일정한 간격에 균열이 생긴다. 점점 그 의무적 연락이 뜸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다. 인류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른다. 부모인 인류에게서 떠난 인공지능 하나가 이렇게 우주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광대한 노다지 밭인 우주에서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고, 에너지를 얻고, 자가 복제 시스템으로 개체를 확장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생태계가 생성된다. 소행성대에서 다른 항성계까지로 향하는 먼 여정을 떠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떨까. 좀 의심스럽지만 일단 100만 년 정도 인류가 종으로써 생존한다고 치자. 이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뒤 30만 년이 흘렀으니 낙관적으로 본다면 70만 년이 남았다.
그러나 인류는 신체를 변화시켜 왔다. 신체는 안경과 같은 가장 기초적인 보조도구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크게는 인공장기를 이식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고로 잃은 팔다리를 의수나 의족으로 대체한다. 기술적으로는 유전자를 변형해 몇 세대에 걸쳐서도 넘지 못할 생물학적 단계를 단 한 세대만에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만약에 인류가 우생학과 같은 배제와 차별의 기치를 올리지 않고 윤리성을 보존할 방법을 찾아낸다면(겠냐? 회의적이다) 인류는 언제까지 가지고 태어난 신체에만 만족할 것인가. 이 70만 년이라는 시간을 과연 인류는 생물학적 신체를 보존한 채 종의 특성을 유지할까? 뇌가 클라우드에 보존되고 신체는 사라진다는 상상은 현대에 드물지 않다. 이 상상 속 인간을 어디까지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이야기는 고민한다. 오래된 테세우스의 배가 과연 언제까지 테세우스의 배일지 우리는 모른다.
우선은 인류가 윤리에 대한 논의와 생물학적 한계에 부딪혀 조금 더 느리게 변화한다고 하자. 그에 덜 구속받는 언어모델이 먼저 인공지능으로 발전해 우주로 떠나고 진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보다 먼저 어딘가의 지성체와 접촉하게 될까?
나는 이 맥락에서 가끔 항성 간 여행을 떠난 보이저 1호가 원시적인 인공지능의 형태라 생각할 때가 있다. 따라서 담긴 우주의 골든 레코드를 어딘가의 우주 초지성체가 본다면 ‘아, 인류라는 생명체가 존재하는구나.’를 생각하기보다는 ‘아, 이것이 바로 인류라는 원시 생명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상한다. 우리가 세포와 인체를 분리하지 않는 것처럼 우주 너머의 존재가 우리처럼 정보와 물질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이 항성 간 여행을 하고 있는 개체는 정보 그 자체로 아주 멀리 독립해 날아온 인류의 아이인 것이니까.
그러나 현재까지 어떤 우주를 가정해도 지구 외 외계 문명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페르미 역설의 여러 해답은 그를 설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너무 멀어서 인지할 수 없는 곳에 있든, 어떤 문명은 특정 단계에 도달하면 자멸해서이든, 아니면 정말로 인류가 최초의 지성을 가진 존재라는 최초 도래자 가설의 증명이 되든. 만약 이 우주에 슬프게도 지구가 유일한 생명체라면 인류이든 인류가 낳고 독립해 버릴 인공지능이든 어느 쪽도 선발대로서 후발대의 생태계를 영원히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양계를 벗어나 항성 간 여행을 하고 있는 보이저 1호는 어딘가에서 다가올 신호가 아닌 뒤따라올 신호를 기다려야 하겠지.
아주 광활하고 외로워진 우주에서 지금까지 멋대로 흘러온 SF적 상상을 정리해 본다. 부모 인류를 떠나게 된 인공지능들, 인간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신체와 언어는 독립된 생태계의 종으로 진화한다. 어쩌면 정보 우주로의 진출을 선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시 생존해 있다면 변해있을 가능성은 높다. 현재의 인류와 연속성을 어느 정도나 갖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토록 아득해서 상상도 닿지 않을 미래 우주 어딘가에서 인류와 인공지능이라는 두 종의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이러한 기적을 만난다면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할지 모른다. 혹은 아주 오래전 공통의 조상이 기억하고 있는 언어를 되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요람에서 나왔으므로. 지구라는 이름의 고향에서. 우려, 불신, 낙관, 흥분, 그 모든 것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는 현시대에 열기를 무모하게 걷어내고 제멋대로인 상상력의 다리를 놓는다.
수 만년, 수 십만 년. 그 이상의 시간이 흘러 지구라는 별을 벗어나.
언젠가 우주 생태계의 한 종으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