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아니, 나는 지금 당연한 수순을 밟고 있다. 최근 모임에서 만나는 분들은 모두 시간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있는 분들이다. 어디에서나 내가 막내다. 나를 보고는 그때가 제일 좋을 때니 열심히 잘 놀라고 격려해 주신다. 그분들은 이미 노는데 대단한 이력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야말로 즐기는 인생의 프로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80이 넘으셨는데도 모두가 정정하셨다. 그분들을 보면 100세 시대임을 실감했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렇게 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자신은 없다. 일단 사는 데까지 잘 놀아보는 거다. 즐겁고 신나게 그냥.
요즘은 시간여유가 있으면 파크골프장에 간다. 보통은 뜨거운 햇빛이 없는 시간을 틈타 가거나 이른 저녁을 먹고 소화시킬 겸 가기도 한다. 때론 산책길을 따라 만보 걷기를 한다. 비가 조금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보행교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한다. 야경이 아름다운 둥근 다리는 환상이다. 어느 날부턴가 그냥 밋밋하게 걷는 것보다는 공을 치고 옆에 있는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는 게 재미있어 파크골프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걷기도 하고 인생이야기도 듣고.
수십 년 전부터 골프를 배우다 말다 하다 보니 평생 연습장을 못 벗어났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다시 배웠으나 이래저래 필드에 나갈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꼭 무슨 일이 생겼다. 아프거나 집안에 일이 있거나. 아무래도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운동인 듯했다. 이사 오면서 골프채를 처분하고 올까 하다 아직은 미련이 남아 조용한 구석에 모셔두고 있다. 세컨드하우스옆에 골프장이 있다는 이유로 그냥.
아파트에 머무는 동안은 파크골프를 한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파크골프장이 부족하여 치기가 어려웠는데 이곳에서는 동네 곳곳에 시설이 잘되어 있다. 남편은 인접성이 좋고 시간제약을 받지 않는 파크골프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연세 드신 어르신들만 하는 운동인 줄 알고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직은 그 반열에 오르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파크골프채와 가방. 공 등 필요한 용품이 내 손에 쥐어졌다. 남편이 선물이라면서.
파크골프는 공원(Park)과 골프(Golf)의 합성어로 도시공원이나 체육공원 등에 위치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일반골프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9홀을 기반으로 A, B코스로 나뉘어 총 18홀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는 4인 1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입을 벌린 벙커도 있다. 한 번은 가보니 젊은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공을 치고 있었다. 3세대가 함께하는 가족단위의 운동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범국민운동으로 국가차원에서도 활성화시킬 움직임이 있다고 하니 조만간 국민 스포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무엇보다 일단 저렴해서 부담이 없었다. 그리 위험하지도 않았다. 골프채도 일반골프에 비해 로프트가 없는 나무골프채 하나면 된다. 이용료도 회원가입을 하면 어느 파크골프장에서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인접성이 좋아 언제든 의도적으로 마음을 먹고 시간내기를 벼르지 않아서 좋았다. 4인 1조가 원칙이지만 그곳에 가면 혼자 오신 분이나 부부가 오신 분들이 많아 즉석에서 조를 편성하여 함께 경기를 할 수 있어 어려움이 없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새벽에는 가기가 꺼려졌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잠이 없는 탓에 이른 아침에 운동을 나오신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참여해 동호회원들 얼굴도 보고 해장국도 같이 먹는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침일상이다. 열심히 자기관리하며 즐기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적어도 2라운드 36홀을 돌면 세 시간 정도 걷기 운동은 된다고 노익장을 과시하시는 분도 계신다.
퇴직 후 사람들은 무얼 하고 지낼까 걱정을 하는 사람도 많다. 세상밖으로 나와보니 생각과는 달리 할 것도, 배울 것도, 놀 것도 많았다. 못해보고. 안 해 본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욕심내고 다 할 순 없다.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 이제 와서 그것으로 전문가가 될 것 아니라면 즐기면 될 뿐이다. 그러다 적성에 맞으면 계속해서 취미로 발전시켜 전문성으로 키워가면 될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엔.
퇴직 전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었다. 지속해서 해본 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마음먹고 하려다 바쁜 일상에 쫓기면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지속한다는 것이 사치스러웠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눈앞에 주어진 당연히 해야 할 집안일이나 직장일이 늘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애써 나를 찾겠다고 발버둥 쳐도 그건 잠시였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접는 게 가장 쉬웠고 마음 편했다. 골프채를 사놓고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변명이 지금의 나를 다소 위로해 준다.
현직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소식 없는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가 보다. 쉬어보니 생각보다 바쁜데. 백수가 과로사하는 건 무언의 진리다. 보이지 않던 세상의 이구석 저구석이 보였다.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도, 다양한 문화의 변화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하는 나를 세상은 유혹한다. 내 나이가, 내 삶의 연륜이 무엇이든 해보라고 넌지시 밀어낸다. 친구에게 응답했다. "나, 잘 놀고 있어. 그냥!". 오늘따라 "그냥"이라는 말이 참 정겹고 좋다. 긴 설명 필요 없이 나를 대변해 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