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클래미식회 ㅣ 한공기

by 한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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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


서양에서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은_ 독일 철학자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입니다.

이 책은 초인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슈트라우스는 음악의 초인…이자 지독한 나르시스트 입니다.


대학에서 미학과 철학을 배운 슈트라우스는 철학을 음악으로 녹이려 했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악보에는 니체의 문장을 적어놓았다고 하네요.


이 곡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첫장면에서 나왔는데요,


사실 영화 첫장면 음악은 다른 곡이었습니다. 그런데 감독이 시사 직전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바꾸었다고 하네요.

영화 오프닝에 나오는 곡이 카라얀의 지휘곡인데 카라얀 상의도 없이 써버린거죠.

그 결과

카라얀과 음악감독이 엄청 쇼크받고 엄청 화를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 .. 호흥은 아주 대단했다고 함


전곡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전곡을 들어보라고 추천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부분 말고는 다른 부분은 매우 서정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악장- 밤을 걷는 나그네의 노래- 는 달빛 아래 산책을 하는 초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합니다.


슈트라우스는 부유한 삶을 살았던 행운아 입니다.

아버지는 바이마르의 유명한 호른 주자이고 어머니는 부유한 양조업자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뮌헨 남자인데 고집불통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약한 어머니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는데요.

이런 계기로 슈트라우스는 화목한 가정에 집착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후에 가정교향곡을 짓게 되었나봅니다.


슈트라우스는 6살 때 부터 모짜르트에 버금가는 음악 신동이어서 그랬는지 대학을 음대로 가지않고

미학과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천재여서 졸업도 하기전에 다 배웠는지 대학을 중퇴합니다.

그리고 집중적인 음악활동을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청년들에게 가장 트렌디하고 뜨거운 도시 베를린!

슈트라우스가 자란 보수적인 뮌헨과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뮌헨은 알프스의 북동쪽. 굳건한 지맥에 몸을 기댄 뮌헨은 무뚝뚝하고 촌스러운 분위기의 보수적인 도시 입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정치적 우파의 본거지이죠.

당시 베를린 마이닝겐 궁정 악단의 지휘자이자 최고의 거장으로 추앙받던 한스 폰 뷜로의 만남은 슈트라우스 그의 인생에서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최고의 궁정 악단의 부지휘자 자리를 21살의 슈트라우스가 맡게 되었거든요. 두둥!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지휘봉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넥타이 지휘’ 라 유명한데요. 왜 그럴까요?


슈트라우스 “지휘할 때 지휘자는 결코 땀을 흘려서는 안된다. 오직 청중만이 흥분해야 한다.” 말했습니다.

그 말은 지휘자가 너무 과도하게 곡을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넥타이를 들고 지휘를 하듯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 썼다고 하네요.


오직 악보에서 답을 찾았던 그에 대해 카라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메트로놈처럼 정확하지만, 오로지 음악 속에 숨겨진 리듬을 찾아내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음악이 진정 앞으로 향해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극찬이네요.


지휘자로서 ‘즉흥성’이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는 바그너에게 음악적으로 깊은 영감을 받은 지휘자였습니다.

악기 연주자 못지않게 악기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높았고 문학이나 회화에도 깊은 안목을 가져 자연스럽게 교향시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의 곡중 '교향시'가 유명합니다.



교향시란 주로 시적(詩的) 또는 회화적인 내용에서 영감을 얻은 관현악 작품으로 표제 음악의 일종이다. 표제를 곡의 제목으로 명시하거나 또는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협의의 의미로는 '다악장(多樂章)의 표제 교향곡' 등과 구분하기 위하여 단일 악장으로 된 음악을 가리킨다. '음시(tone poem)'라고도 한다. 교향시는 '교향적(symphonic)'과 '시(poem)'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음악의 새로운 장르이다.


교향시가 지향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형식에 있어서 경직되어버린 빈 고전주의의 '갱신'과 새로운 교향적 기법을 통한 대(大)형식의 창출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 자체가 한편의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문학의 내적 본질인 '시성(poesie)'를 그 자체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음악 고유의 수단을 통해 계속적으로 시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요소의 도입은 훗날 국민주의적 정신을 지닌 작곡가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음악을 역사상의인물이나 사건에 결부시킬 수 있게끔 했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변용'의 처음에는 이런 시가 나옵니다.



싸움과 불면과 피로, 열병에 들뜬 병자는 지나간 생애를 주마등처럼 본다.

그의 생활 지침이 된 하나의 높은 목표는 그가 보는 모든 정화된 것을 보다 더 정화된 형태로 이끌어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상에서 그가 동경하고 구하던 것을 여기서 맞으라고 힘찬 소리가 울려온다.

지상에서의 해방, 지상의 정화


음악의 서문에 붙인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과 싸우던 한 남자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두려움 대신 용기를 품으며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 몽상적인 초반부를 지나 임종이 가까워 오는 순간에는 마치 발작하듯이 강렬해지지만 마지막은 하프의 연주로 안식을 주듯 수그러들면서 마무리 (중간-끝)


죽음이라는 주제를 강렬하면서도 낭만적으로 표현한 이 곡은 교향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당시 스물 다섯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대담하게 풀어낸 작곡가의 자신감이 돋보임.


교향시 ‘돈후앙’ 관객의 극찬을 받으며 작곡가로 성공을 거둠 …

그는 돈후앙의 인기로 자신감을 갖고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내가 가고싶은 길에 올랐다는 사실, 미치지 않은 예술가로 간주되었음을 알았다는 것에 편안하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 것인데 그때 나이가 겨우 26세 정도 밖에 안되었을 때니

거의 음악계의 장근석이 아닐까? 클래식 허세...



그의 곡 '영웅의 생애'는 자신을 주제로 삼아 쓴 곡

즉 자신을 영웅으로 묘사했다.


천재 특유의 나르시즘으로 언제나 여유 있게 음악을 작곡했던 그는 자신감이 넘쳤던 천재 작곡가였으니 그를 향한 질투는 당연했다.

가장 친했다고 알려진 구스타프 말러마저


‘곧 그의 시대가 가고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말러는 당시 특이함으로 인해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아웃사이더였고

슈트라우스는 그런 말러의 음악을 이해한 동료 가운데 한명이었다.


미국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음악을 확실히 지지했다. 1901년 슈트라우스는 독일 음악협회의 회장이 되었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러의 교향곡3번을 협회의 다음 축제 프로그램에 넣으라고 지시. 이후 말러의 곡이 하도 시즌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다보니 일부 평론가들은 이 협회를 <독일 말러 협회>라고 부르기도 했디.


하지만 둘은 은근한 경쟁 관계였는데

제국주의 융성기를 살았던 두 음악가는 서로 곁눈질하며 어깨 자랑을 하는 라이벌이었다.

말러가 일명 <천인교향곡>으로 불렸던 8번 이어서 <대지의 노래>를 작곡하고 세상을 떠나자

슈트라우스는 호른이 여덟대가 들어가는 <알프스 교향곡>으로 호방한 규모를 과시했다.


두 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재밌다.


말러는 온 몸을 흔들며 발을 구르며 지휘를 하는 스타일이고 슈트라우스는 움직임이 거의 없던 지휘자였다.

슈트라우스에게 움직임이란 두 손을 가볍게 까닥거린다거나 눈으로 바라보는 정도라 하니 카리스마가 엄청 났을 거 같다.


음악 신동으로 어린 시절부터 잘 풀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는 달리 힘든 시기를 지나 뒤늦게 인정받은 구스타프 말러는

“우리는 산의 반대편에서 갱도를 파다가 마침내 지하에서 만나게 되는 두 광부와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슈트라우스와 평생을 음악적 동료로 지냈고 서로의 오페라를 지휘할 정도로 깊은 영감을 나누었다.



슈트라우스는 실험적인 작품도 내놓았는데 그건 문제의 걸작 <살로메> 이다.



예언자 요하난은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이유로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헤로데의의붓딸이자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는 헤로데의 음흉한 시선보다는 요하난의 매력에 점점 빠져 들었다. 그래서 살로메는 자신에게 홀린 듯 마음을 빼앗긴 경비대장 나라보트를 시켜서 요하난을 지하 감옥에서 데려오게 하였다. 결국 살로메가 요하난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요하난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나라보트는 자신이 사랑하던 살로메가 다른 남자에게 욕망을 드러내자 강한 충격을 받고 자결해 버린다. 살로메는 나라보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요하난에게 구애를 계속하지만 요하난은 이를 거부하고 감옥으로 되돌아갔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아 연회가 벌어졌을 때 살로메는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이에 흥겨운 헤로데 안티파스는 살로메에게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살로메는 요하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즉시 요하난을 처형하여 약속을 이행할 수 밖에없었다. 마침내 살로메가 목이 잘린 요하난의 입에 키스를 하자, 화가 난 헤로데 안티파스는 병사들을 시켜서 살로메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보지 않았어야 할 작품" ,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27년간 상영을 금지한 작품"으로 악명이 자자한 작품이다.


살로메는 성경 속의 여인인데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개작한 작품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


슈트라우스의 사랑…이야기는 별거 없음. 가정적인 가장


숱한 염문을 뿌리기 쉬운 음악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젊은 시절 만난 아내만을 평생 사랑하며 살았다.

그의 아내는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던 소프라노 가수 파울리네, 슈트라우스는 아내에게 받은 영감으로 여러 오페라를만들었다.

‘영웅의 생애’에서는 영웅의 반려자를 아내의 모습으로 표현했고

‘4곡의 마지막 노래’는 온전히 아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할 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들 프란츠를 낳은 후에 만든 ‘가정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헌신하고자 했던 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 ‘가정 교향곡’은 이후 다른 피아노 협주곡에 다시 한 번 사용되기도 했는데 슈트라우스가 가족에 대해 가졌던 사랑이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의 오페라 중 사랑에 대해 다룬 또 다른 작품 ‘장미의 기사’ 이다.

장미의 기사란 청혼을 대신 전하러 가는 심부름꾼을 말한다.

18세기 빈에서는 혼담이 오간 후 신랑 쪽 친척 한 명이 예비 신부에게 은으로 만든 장미를 예물로 전달하는 전통이 있었다고한다. 작가가 이야기를 위해 지어낸 전통이라는 후문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결혼 준비는 쉽지 않다. 한 후작 부인과 그녀의정부 젊은 백작의 은밀한 불론, 결혼을 앞둔 새 신랑 신부가 좌충우돌 부딪히면서 생기는 이야기. 청혼을 대신 전하러 갔던젊은 백작과 신부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지금으로 치면 막장들라마이다.

장미의 기사에 나오는 여성 오페라 파트의 내용이다.




시간이 흐르는 걸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리지

때로 한밤중에 그 소리를 듣고

시계란 시계는 모조리 멈춰 놓지만 소용없는 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아무리 멈추고 싶어도 소용이 없는 일



참으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이다.


그는 독일 나치가 집권하면서 제국 음악원장으로 취임한다.

그가 유태인을 포함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나치에게 협력했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가정교향곡을 쓸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며느리 앨리스가 바로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치에 협력했던 진짜 이유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몇 번 며느리가 잡혀간 적이 있었지만 제국 음악원장의 힘을 이용해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치 아래서 음악을 만들 때에게도 ‘평화의 날’이라는 단막 오페라를 기획하는 등 용감한 작업들을 이어갔고 나치에 대한 서명을 거부한 이유로 결국엔 음악원장 자리에서 쫓겨나가기도 한다. 이후 전쟁사범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다행히 무죄를 인정받았다.


슈트라우스는 지금 한국영화판으로 치면 박찬욱이라 할 수 있을까? 봉준호라 할 수 있을까?

매우 대중적인 곡을 만드는 국민 작곡가였다.


https://youtu.be/vH_slBArj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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