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아홉 번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뉴질랜드 남섬 서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웨스트 코스트의 바다는 업무에 중독된 팀장님처럼 보였다. 지칠 줄을 모르고 사납게 밀려오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우람한 소리와 거친 거품을 보고 있노라면 감히 저 바다의 일에 이력서를 내밀고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해변에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고 있어도 결재 서류를 받들고 사장님 방문을 노크할 때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잔은 이 거친 바다 어느 한 귀퉁이에서 삼일 동안 서핑을 배웠다고 한다. 살아있는 파도에 안장을 얹고 올라 탄 기분은 어땠을까. 이제 나는 오래전 제주도 파도 위에 두 발로 올라섰던 내 무용담은 조용히 넣어두기로 한다.
거친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면 차를 세우고 영상에 담거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늑하게 넓고 왕성한 풍경을 충분히 담을 수 없어서 그냥 주저앉아 즐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가끔은 무심코 지나친 곳이 아까워서 차를 돌려 다시 찾기도 했다. 낚시하기 좋은 곳에서는 조금 더 쉬어갈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잔이 영상을 찍는 동안 혼자 서성이다가 해변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여서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더니, 펭귄을 위해 문을 꼭 닫아 달라는 안내가 걸려있었다. 뾰족한 마음도 녹일 것 같은 동글동글 귀여운 안내판의 글씨체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귀여움이 가파른 언덕을 아장아장 올라 도로 진입하려는 펭귄을 보호하고 있는 곳이 뉴질랜드다. 그리고 나는 마주치지도 않은 펭귄과 어쩌면 같은 길을 밟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잔은 뉴질랜드가 어렸을 때 살았던 제주도를 닮았다는 말을 했었다. 나도 깊숙한 숲길을 걸을 때면 한동안 푹 빠져 걸었던 제주의 올레길이 생각났다. 뉴질랜드는 제주도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님같은 느낌이었다. 잘 닦아 놓은 관광지보다 힘들게 걷다가 문득 마주치는 풍경에 감탄이 새어 나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사람이 가득 모여 여유가 없어진 공간에서는 개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줄어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 거대한 케이크를 만든 파파로아 국립공원(Paparoa National Park)의 펜케이크 바위(Pancake Rocks)는 잘 닦아 놓은 길 덕에 접근은 쉬웠지만 인파에 밀려 서둘러 감상을 끝내야 했다.
이 공원은 고래 머리 위의 분수공같은 'blowholes'으로도 유명하다. 팬케이크 바위 구멍 사이로 파도가 세차게 밀려 들어와 얼굴을 때릴 때, 나는 제주도 금능 바닷가에 있는 사랑하는 카페 '그곶'의 크레이프 케이크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엔 내가 좋아하는 '그곶'의 담백하고 깨끗한 크레이프 케이크의 맛처럼 담담하고 정직하게 쌓아 올린 세월이 지각 변동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또다시 묵묵히 거친 파도를 견디고 있다. 나는 삼천만 년 전의 존재들이 오히려 우리를 가만히 굽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더욱 잔망하게 까불었다.
가끔 영어에서 한국어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 언어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생각에 새삼 감탄하며 온 세상 어른이들과 동질감을 느낀다. 덕분에 처음 듣는 표현이라도 무슨 뜻인지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잔이 낚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River mouth'를 언급할 때 '하구'나 '강어귀'라는 한국어가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바다와 강이 입을 맞닿고 있는 풍경이 금세 떠올랐다. 잔은 바다의 여러 얼굴 중에서도 'river mouth'를 좋아했다. 이곳에는 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하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물의 흐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캠프 사이트를 향하는 길에 'Greymouth'에 들렀다. 'Grey'강의 입구에 있는 널찍한 도시는 웨스트코스트 지역의 주도답지 않게 너무 한산하여 작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했다. 오래전 한 정치가의 이름을 딴 도시는 오늘날 회색의 우울한 도시가 돼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도시의 끝, 그레이 강의 끝을 향해 달려드는 잿빛의 거센 파도는 나약한 마음을 휘어잡는 웅장함을 가지고 있었다. 짙은 회갈색 바닷물과 입을 마주친 강의 물줄기가 만드는 묘한 분위기에 나는 고독함과 무력감을 느꼈다.
잔은 두 번째 캠프 사이트로 'Lake Brunner Motor Camp'를 골랐다. 아무 생각 없이 실려가던 나는 'Moana'라고 적힌 도로 안내판을 보자마자 신이 났다. 마침 며칠 전에 보았던 디즈니 영화의 유쾌한 감상이 떠올라 절로 "내가 모아나다!"를 중얼거리며 들뜬 기분으로 도착한 조용한 캠프 사이트는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탁트인 언덕에 있었다. 잔이 사무소에서 값을 치르는 동안 나는 사뿐사뿐 손님 마중을 나온 고양이의 털을 한참 만졌다. 까만 레깅스에 노란 나비의 털이 잔뜩 묻어 황망한 웃음을 짓자 마지막 손님을 받은 아저씨는 털 범벅이 된 자신의 바짓 자락을 가리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공동 부엌, 화장실, 샤워장이 어디에 있는지만 간단히 확인하고 차를 몰아 또 다른 강어귀를 찾았다. 잔은 이리저리 장소를 바꿔가며 낚시를 했고, 나는 낚시꾼 주변을 맴돌며 산책을 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낚시는 잔의 일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잔은 단 하루도 낚시를 잊은 적이 없었다. 비록 오늘 저녁은 아쉽게도 빈손이었지만, 우리는 붉은 색으로 짙게 물든 하늘을 머리 위에 얹고 캠프 사이트로 돌아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