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5차 북벌
234년 촉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갈량도 이제 당대 기준으로 고령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50대의 나이가 되었다. 촉은 3년간의 준비 끝에 무려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상당히 큰 병력이었다.
제갈량은 기존의 기산 루트를 포기하고 야곡 루트를 선택한다. 야곡 루트를 고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야곡 루트는 촉 입장에서 관중으로 가는 길 중 가장 안정적이다. 가장 빠른 자오곡은 병력 운용이 어렵다. 기곡의 경우 출구에 진창이 버티고 있다. 반면 아곡을 넘어가게 되면 미현으로 향하게 된다. 미현은 위수 건너편에 있어 위수 앞에서 대치가 가능하다. 진령산맥 너머로 병력을 보내고 오랜 시간 버티기에 유용하다. 후방에 평원 지대인 오장원이 있어 수비와 둔전이 동시에 가능하다.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적진 가까이에 방어 병력을 세우고 바로 옆에 멀티를 지어 언제든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오장원에서 버티고 있는다면 장안과 농서 지방의 연계를 깨뜨릴 수 있다. 관중에서 농서로 가기 위해선 위수를 넘어야 한다. 오장원에 있는 병력으로 위수를 넘는 위군의 견제가 가능하다. 그 사이 자연스럽게 농서와 강족의 반란을 지원하며 관중을 서서히 압박한다.
이는 기존의 전략과 순서를 바꾼 것이다. 기존에는 농서 -> 양주 -> 관중 순서의 정벌이었다면 이번에는 관중 -> 농서-> 양주로 순서를 바꾼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제갈량의 목표는 장안성이다.
사마의는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제갈량을 막으러 나선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야곡을 통해 넘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현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미현 바로 아래에 위치한 무공과 후방에 위치한 오장원 중 어느 곳으로 이동할지 지켜본다.
만약 제갈량이 과감한 인물이라면 무공으로 향하겠지만, 그는 본래 신중한 성격이라 오장원으로 향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이동한다. 오장원은 둔전을 위한 지역이기에 무공에도 명사를 파견해 미현을 견제한다. 무공에는 위연을 보내 사마의의 본대를 견제하게 한다. 제갈량의 병력은 오장원에서 둔전을 시작한다. 적진 앞마당에 빠르게 멀티를 구축했다.
제갈량은 오장원에 자리 잡고 위나라에게 계속 선제공격을 강요한다. 실제로 북벌을 하는 건 촉나라다. 하지만 제갈량은 수비 측에게 선제공격을 유도한다. 4차 북벌과 마찬가지 전략이다.
제갈량은 지극히 안정적이었지만 과감성은 분명 부족했다. 물론 촉나라 병력으로 미현을 공격하는 경우 사마의 측이 미현에서 농성을 시작하면 사실 이길 방도가 없다. 하지만 과거 원소도 역경에서 불리함을 알았지만 역경성을 돌파했다. 전쟁에 100퍼센트는 없다. 이런 소극적 대응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제갈량이 원하는 대로 해줄 사마의가 아니었다. 사마의 역시 제갈량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어차피 공격을 해오는 건 촉나라다. 미리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다. 반면 일생을 촉나라와 싸운 위나라 장수 중 곽회만은 촉이 분명 이번에는 무언가 움직임이 있으리라 주장했다. 4차 북벌과는 달리 관중 지역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고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위나라를 자극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거라 생각한다. 사마의는 곽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오장원 북쪽에 위치한 북원에 파견한다.
곽회의 예상대로 제갈량은 강유에게 소수의 병력을 주어 위수 강변에 있는 여러 도시들을 공략한다. 그리고 북원에 있는 곽회가 강유를 맞이한다. 만약 곽회의 간언이 없었더라면 위는 제갈량에게 뒤를 잡힐뻔했다. 강유는 곽회의 수비를 뚫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막혔다. 곽회는 마치 촉나라 군대의 머리 위에 있는 듯이 그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읽었다.
그렇게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치는 장기화되고 있었다.
제갈량의 5차 북벌이 한창 시작될 시점에 오나라에도 연락했다. 오나라 역시 이에 곧바로 호응하여 양갈래로 군대를 보낸다. 오나라 역시 촉이 3년간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발을 맞춰 대규모 원정을 준비한다. 234년을 기점으로 중국 전체가 대규모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간 셈이었다.
오나라는 무려 3갈래로 군대를 진군시킨다.
1) 강하 방면 : 육손-제갈근
형주 방면 지휘관이자 오나라 대도독 육손과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 군대를 이끌고 강하로 진군한다. 강하는 오나라 입장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최전방이었다. 만총이 버티고 있고 수비가 용이한 합비와 달리 강하-양양 방면을 상대적으로 공략이 수월했고, 촉나라와의 연계도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지 이곳도 쉽게 무너질 지역은 아니었다. 특히나 남형주는 유비의 지배력이 남아있었다.
강하 방면 지휘관 육손은 이릉대전에 유비의 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오나라 스타로 떠오른 지휘관이었다. 이후 형주 방면에서 위나라의 군대를 상대하며 촉나라와 지속적으로 연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육손은 훗날 오나라 승상에 오른다.
2) 합비 방면 : 손권-주환
육손이 측면을 공략하는 동안 손권은 합비로 곧장 나아간다. 이곳이 위와 오나라의 전쟁의 주무대이다. 제갈량이 기산 마스터라면 손권은 합비 마스터였다. 기산을 확보해야 촉나라가 장안에 갈 수 있듯이 합비를 확보해야 오나라가 위나라의 주요 도시 허창에 갈 수 있다. 손권은 동오의 지배자가 된 이래 계속 합비를 공략했다. 하지만, 이곳엔 대오 방면 에이스 만총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만총은 합비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합비는 오나라의 전초 기지인 유수구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다. 합비가 아무리 수비에 용이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노출당하면 언젠가는 뚫릴지 모른다. 그래서 만총은 합비 주변에 새로 신성을 건설해 오나라가 합비를 공략하는 경우 이를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3) 광릉-회음 방면 : 손소-장승
손권은 이에 더불어 한 가지 카드를 더 만든다. 합비 후방에 위치한 광릉-회음 방면을 견제한다. 이번 원정이 오나라 입장에서도 큰 규모로 진행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위나라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인 동부 전선은 합비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라는 생각을 깨뜨리려는 목적이었다.
이렇게 3개군의 대대적인 원정이 시작된다.
손권의 대군이 유수구를 건너 합비로 향한다. 오나라 입장에서도 만총이 합비 방어를 위해 신성을 새로 지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아무리 떨어진다고 하더라고 합비를 공격하면 신성에서 배후를 치러 들어올 것이라는 것은 너무 뻔했다. 손권의 선택은 신성이었다. 그리고 합비에서 오는 원군을 막기 위해 병력을 절반으로 나눈다. 신성에 절반의 군대가 가고 나머지 절반은 후방에 있어 합비의 병력이 나오면 곧장 쳐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합비에 있던 예주자사 만총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신성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자 전예가 이를 저지한다.
“오군이 신성으로 출격한 것은 신성을 공략하는 척하며 우리의 대군을 끌어들이기 위함입니다. 오군은 우리가 신성으로 나서면 후방의 병력을 동원하여 합비를 공략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신성을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고 적극적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신성이 농성전으로 버티며 적이 지치길 기다린 후 시간이 지난 다음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예의 계책을 들은 만총은 이를 받아들여 신성에 있는 병사들에게 버티라고만 말해둔다.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손권은 예상과 달리 합비의 병력이 나오지 않자 당황한다.
만총은 동시에 신성을 구원하기 위해 곧장 조예에게 상소를 올린다. 하루아침이 급하니 곧장 합비와 신성을 구하러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조휴, 조진, 장합 모두 죽은 와중에 믿을 만한 장수는 만총이 유일했다. 조예는 만총이 이렇게 다급하게 상소를 올린 것을 보고 분명 위급한 상황이라 판단한다. 조예는 사마의에게 촉나라와의 싸움을 적극적으로 하지 말라고 일러두고 곧장 수도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에서 합비로 향한다.
손권의 계책은 나쁘지 않았다. 신성은 그리 큰 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성은 손권의 예상외로 잘 버텼고, 만총의 대응은 빨랐다. 조예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자 손권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곧장 군대를 물리고 철수한다. 손권은 이번에도 만총을 넘어서지 못했다.
손권이 퇴각했다는 소식은 육손에게도 전해진다. 양양성에 있는 문빙과 대치하고 있던 육손 역시 군대를 물린다. 아무리 시기가 좋았다 한들 육선은 촉이 아닌 오나라 신하였다. 광릉으로 향한 손소의 군대도 아무것도 못하고 철수했다. 무려 3개 루트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오나라는 아무런 성과를 기록하지 못하고 퇴각한다.
이는 동시에 제갈량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음을 의미한다.
다시 사마의와 제갈량이 대치하고 있는 오장원으로 돌아가 보자.
전간기 동안 위나라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마의는 관중 지역에 물자 보급을 위해 위수지역의 개간을 실시했다. 제갈량의 북벌을 막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조치였다. 오장원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갈량이 곧장 오장원을 정벌하여 위나라가 가진 이점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위나라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오장원은 지리적 이점이 상당하다. 오장원의 식량 생산량은 상당했고, 향후 진행될 북벌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번 북벌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오장원에서 계속 버티고 있다면 옹주 방면도 서서히 견제를 받는다. 미현과 진창 정벌에 성공하고 장안으로 원정군을 보낸 다면 오장원을 통해 보급을 계속 받을 것이다. 진령산맥을 넘지 않아도 된다.
제갈량은 선제공격을 강요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여자 속옷을 보내며 도발하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마의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위수 이남의 지배력을 점차 강화시킨다. 그리고 뒤를 공략한 강족에게 계속 물자를 보낸다. 사마의가 못 버티고 나올 수밖에 없는 장치도 만들어 놨다. 완벽주의자 제갈량의 계산은 철저했다.
그러나 천하의 재능 제갈량이 딱 한 가지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건강이었다.
P.S.
최대한 정사 삼국지를 기반해 작성했으나 서기 200년대의 자료가 희박해 작가의 해석과 '삼국지연의'의 스토리를 포함되었습니다.
당대 인물들에 대한 이미지 자료가 희박하여 '코에이(KOEI)'사에서 개발한 '게임 삼국지' 시리즈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