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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y 31. 2022

우주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

태양중심설을 정리한 요하네스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 ( 출처 : 위키백과 )


태양중심설(지동설) :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이론.



  고대 사람들은 온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람은 지구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매일 밤하늘에 뜨고 지는 별을 본다. 그렇기에 천동설은 고대 사람들에게 상식처럼 받아 들어져 왔다. 기원전의 과학자들은 직접 눈으로 별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그리스의 천문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이 보고 느낀 별의 움직임과 과거 자료를 집대성해 지구중심설, 이른바 천동설 이론을 정리한다.

   그 이후 1500여 년간 천동설은 천문학에서 주류로 자리 잡는다. 종교적인 이슈와 결합해 온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는 것은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일부 천문학자들은 이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16세기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관을 주장한다. 태양중심설, 이른바 지동설의 대두였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이 믿는 상식을 깬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17세기, 전 세계인들의 상식에 과감하게 도전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을 집대성하고 직접 본인이 관측한 자료로 자신의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천문학에 대단한 발전을 기여하는 자신만의 3가지 법칙을 만들어 낸다. 이 법칙으로 그는 근대 최고의 천문학자로 추앙받게 된다.


  그는 바로 갈릴레이 갈릴레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인류의 과학 혁명을 이끈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요하네스 케플러다.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최초의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점성술사”

- 칼 세이건(코스모스의 저자) -



지구중심설



지구중심설과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직접 경험한 것만 믿는다.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늘 우주는 미지의 세계다. 달까지 정복한 현대에도 마찬가지인데, 지상에서만 살아간 고대 사람들은 더 심했다. 심지어 망원경도 없던 고대인들은 직접 두 눈으로 별을 바라봤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수많은 별은 신의 영역이었다.

  자전과 공전의 개념이 없었던 기원전에는 태양이 일정하게 움직이면서 별은 각자에 위치에 정지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 된다. 실제로 기원전부터 많은 별자리 지도가 만들어졌다. 고대인들은 북극성의 위치를 이용해 어두운 밤에도 항해를 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똑똑하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똑똑한 고대인들이라도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상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가정을 통해 동심원 모델이 탄생한다. 동심원 모델이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계에 존재하는 행성들이 공전한다는 구조를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심원 모델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다. 바로 태양계 행성들(현대 기준의 용어로)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이다. 동심원 모델이 맞다면 태양계 행성도 태양과 같이 일출과 일몰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지구에서 쉽게 관측 가능한 금성과 화성은 하루를 주기로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위치에 오래 머물면서 조금씩 움직인다. 동심원 모델로서는 금성과 화성의 움직임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이다. 기원후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는 본인의 저서 '알마게스트'에서 주전원을 이용한 천동설 이론을 설명한다. 당시 그가 측정한 행성의 움직임은 정교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심원과 주전원 모델을 이용해 일정하지 않은 태양계 행성들의 움직임을 주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정교한 계산은 사람들이 지구중심설은 사실로 믿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천동설을 집대성한 프톨레마이오스 ( 출처 :  위키백과 )



  여기에 천동설이 더 발전하게 된 계기는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중세로 오면서 세계사의 중심지였던 유럽과 중동 지역에 가톨릭과 이슬람이 발달한다. 신이 창조한 우주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온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교리가 더욱 강화된다. 성경에 있는 구절 중, 절대자가 태양을 멈췄다는 구절 때문에 태양은 움직여야 했다. 칼 세이건이 언급한 대로 천동설은 인간에게 마음에 드는 환상이다. 




지구중심설(천동설) : 우주의 중심인 지구 주위를 천체가 운동한다는 이론. 태양, 달 등 모든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천동설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는 무려 기원전 3세기에 태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관을 주장했다.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관을 주장한 이유는 월식 현상 때문이었다. 월식은 태양으로 생긴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린 것이다. 그는 월식 현상을 이용해 지구와 달의 크기의 비를 알아낸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 태양과 지구의 거리와 지구, 태양의 지름을 알아낸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지구와 태양의 지름의 길이가 5배 차이 난다고 계산했다. (실제 태양과 지구의 지름은 109배 차이가 난다.) 계산의 오차가 너무 크긴 하지만 무려 2300여 년 전에 태양과 지구의 지름을 구하려 했다는 시도 자체가 대단하다. 직관적으로 크기가 큰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보다 작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해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한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저서는 당대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1700년이 지나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가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저서가 다시 역사에 이름이 오르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와 조르다노 브루노



  케플러는 현재 독일 슈투트가르트 지역에서 1571년 출생했다. 칠삭둥이였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지만 영리한 아이였다. 그는 여섯 살에 대혜성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영재학교에 들어간 케플러는 사회성이 많이 부족했다. 그가 유년기에 쓴 일기에는 온통 친구들과 싸운 얘기밖에 없었다.

  1589년 튀빙겐 대학교에 진학한 케플러의 전공은 신학이었다. 당시 신학 전공자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같이 배웠다. 특히 그가 놀라운 성과를 보인 학문은 점성술이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자신의 은사 중 한 명인 천문학교수 미하엘 매스틀린을 만난다. 대부분 신학교 교수들은 지구중심설만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반면 매스틀린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같이 소개했다. 매스틀린의 수업을 들은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매료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천문학자이자 사제다. 지동설의 아버지라 불린 그는 거의 사장될뻔한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을 끄집어 올린다. 사제가 주 직업인 코페르니쿠스는 사제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평생 공부한 천문학을 집대성하여 책을 쓴다. 이 책이 바로 현대 지동설의 근간이 되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였다. 이 책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태양을 중심으로 한 천구가 더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그의 저서는 천동설을 믿는 과학자들과 가톨릭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당한다. 여론이 두려운 코페르니쿠스는 저서의 출간을 계속 미뤘다. 모두가 맞다고 하는 걸 아니라고 말할 용기는 쉬운 게 아니다.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채택하여 새로운 우주를 주장한 '조르다노 브루노'는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받아 죽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있고 태양은 그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

- 조르다노 브루노 '무한 우주론' -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자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위에 브루노가 말한 우주관은 현대와 상당히 유사하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기 싫었던 브루노는 결국 교황청의 명령으로 화형당한다.



조르다노 브루노 ( 출처 : 위키백과 )



우주 구조의 신비와 갈릴레이



  천문학을 계속 공부하고 있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1596년 '우주 구조의 신비'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기존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기반으로 기하학적인 모델을 추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정립했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정다각형 모델을 주장했다. 플라톤의 다면체를 구형의 천구에 내접시킨 방식의 우주관이었다. 이 책을 작성하는 데에는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의 도움이 매우 컸다.

  케플러나 정다각형 모델을 정립한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많이 작용했다. 우주 자체를 신으로 생각한 케플러는 태양을 성부, 항성 천구를 성자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을 성령이라 가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부, 성자, 성령은 가톨릭의 삼위일체론에서 나온 개념이다. 성부는 하나님, 성자는 예수,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 성령과 다면체 이론을 결합시켰다.

(필자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다소 부정확한 정보일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매스틀린은 제자 케플러의 저서를 여러 천문학자에게 보내 의견을 구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무작위로 많은 사람들에게 저서를 발송했다. 저서를 받은 사람들은 엄청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있었다. 그는 우주 구조의 신비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케플러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낸다.




나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어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




  갈릴레이의 편지를 받은 케플러는 충격을 받는다. 과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증명을 자신이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케플러는 이 편지를 계기로 좀 더 실증론에 기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케플러는 저서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상상으로 작성한 지표들을 기반으로 작성했다.



튀코 브라헤 ( 출처 : 위키백과 )



튀코 브라헤와의 만남



  튀코 브라헤는 덴마크 태생의 천문학자이다. 그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천문학자였다. 튀코 역시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굉장히 뛰어난 시력은 가진 브라헤는 평소 천체의 흐름을 관찰해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튀코는 여러 조수들을 거닐고 별의 움직임을 연구했다. 케플러 역시 그의 조수가 되기를 자처했다. 케플러는 곧장 튀코가 있는 프라하로 이동했다.

  케플러의 기대와 달리 튀코는 그를 차갑게 대했다. 케플러는 자신이 브라헤의 연구소에 정식 조수로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브라헤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2달 가까이 손님으로 머물게 했고, 자료 역시 극히 일부분만 공개했다. 케플러의 노력 끝에 간신히 조수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볼 수 있는 자료는 여전히 한정적이었다. 둘은 연구를 하면서 맨날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튀코는 케플러를 잠재적인 경쟁자라고 생각해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생활은 2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케플러가 브라헤의 방대한 천체 관측 자료를 손에 넣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튀코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황당했다. 명망이 높은 귀족의 저녁 만찬에 초청받은 그는 술자리에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오줌을 계속 참았다. 그러다가 방광염에 걸려 쓰러졌다. 간신히 깨어났지만 병이 완전히 악화되었다. 그리고 11일 뒤에 사망하게 된다. 튀코는 죽기 직전 케플러를 불러 더욱 연구에 전념해 달라고 부탁하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그가 수십 년간 관측한 방대한 천체 자료가 케플러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튀코와 케플러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점. 그리고 튀코의 죽음이 너무 갑작스럽고 개연성도 떨어진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들은 케플러가 그를 죽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케플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점성술사 겸 수학자가 되어 막대한 재정적 지원까지 받으며 연구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케플러가 살았던 그라츠의 생가



갈릴레오와의 연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원 덕분에 그의 학문적 연구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케플러와 같이 지동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지동설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몰두했다. 17세기에 이르러 이제 지동설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천체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은 물론 가톨릭 내부에서도 지구 중심설보다는 태양 중심설이 더욱 합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한다. 하지만 지동설이 여전히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가 집대성한 천동설보다 그 증거가 빈약하다는 점. 그리고 극성 가톨릭 주의자들의 삼위일체 관점의 지구 중심 사상 주장이 문제였다.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이제 지동설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한다. 이탈리아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갈릴레오는 교황의 초청 덕분에 교황청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교황청에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계속 격파에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망원경으로 관측한 자료를 근거로 삼았는데, 이 자료를 제공하고 보증해준 사람이 바로 케플러다.

 

  케플러의 도움으로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집필한다. 그는 갈릴레오는 이 책에서 달이 모형이 완벽한 구형이 아니라는 점. (실제로 달에는 수많은 크레이터가 존재한다.) 목성 주위를 맴돌고 있는 위성이 존재한다는 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반박하게 된다. 이 책의 자료에 대한 보증 역시 케플러가 해줬다.


  그 무렵 케플러는 프라하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연구를 지속해가고 있었다. 프라하와 린츠에서의 연구를 총동원해 3가지 법칙을 만들어 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은 1609년 발간한 '신천문학'에 포함시켰고, 세 번째 법칙은 '우주의 조화'에서 발표했다. 이것이 근대 천문학의 근간이 되는 케플러의 3법칙이다. 이는 전부 튀코의 천체 관측 자료를 근거로 삼았다.


  케플러가 만든 세 개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1) 케플러의 제1법칙 :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궤도 운동을 한다.  

   2) 케플러의 제2법칙 : 타원면에서 같은 시간 동안 행성이 지나간 타원 면적은 일정하다  

   3) 케플러의 제3법칙 : 행성운동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 행성의 거리 세제곱에 비례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훗날 뉴턴이 만든 만유인력에 의해 완벽하게 설명된다.



린츠에 위치한 케플러 동상


케플러의 영향력



  케플러의 말년은 좋지 못했다. 그는 '꿈'이라는 저서로 인해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리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는 마녀 재판의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뒤이어 30년 전쟁이 발발하며 그의 연구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그는 린츠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2세의 이름을 딴 '루돌프 표'를 새로 출간하려 했지만 튀코의 유족들과의 저작권 논쟁으로 인해 계속 인쇄가 미뤄지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연구는 물론 생계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그는 기존에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싸우고 있는 종교계를 비판한 전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루터교에서 축출당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합리적은 주장이었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기에 그를 후원할 사람이 사라지자 종교계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당장 먹을게 없어지자 1630년 케플러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후원해주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루돌프 2세의 비호를 받으며 당대 최고의 천문학 석학이었던 그는 전쟁으로 한순간에 몰락하는 처지가 된다. 여전히 뛰어난 이름값 덕분에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귀족들도 있기는 했지만, 본인들도 전쟁으로 코가 석자인데 그를 후원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케플러는 1630년 무리한 여행과 생활고로 인해 향년 58세로 독일 바이에른에서 사망한다. 그는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 성에 있는 개신교 묘지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많은 망명가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30년 전쟁으로 인해 스웨덴 군대에 의해 훼손당하고 만다.


  이처럼 전쟁은 학문적 연구를 중단시켜 인류의 발전을 막는 요소로 작용한다.

 

NASA에서 제작한 케플러 우주 망원경


  케플러의 연구가 주는 파급력은 상당했다. 그는 근대 과학혁명의 선구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17세기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너무 파격적이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회의 다툼을 비판한 그의 전적과 합쳐져 많은 가톨릭 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갈릴레오 조차 처음에는 그의 주장이 근거가 부족하다 하여 무시했다.

  그러나 1639년 영국의 천문학자 제러마이아 호룩스는 자신이 관측한 금성의 움직임을 통해 케플러의 이론에 힘을 실어준다.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론으로 케플러가 옳았다고 설명한다. 이후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이제 지동설은 완벽한 정설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 철폐되고 케플러의 우주관이 주류 학문이 된 것이다.


  20세기에 오면서 케플러는 과학혁명의 영웅으로 까지 추앙받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그를 기념하는 주화를 만들었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그가 주장한 지동설 학문에 대해 심도 있게 설명했다. 오늘의 글을 쓴 계기 역시 '코스모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의 지구형 행성 탐사 우주 망원경이 이름은 케플러 우주 망원경 (Kepler Space Observatory)이다.


  당대의 주류 학문에 휩쓸리지 않고 정확한 사실을 바라보기. 실증적인 태도를 통한 과학적 이론이 주장. 편견에 휩싸이지 않고 합리적 관점을 가지려는 태도는 과학자라면 응당 가져야 한다. 이는 과학적 이론뿐 아니라 우리가 직접 겪는 가치관에도 적응되는 말이다. 남들이 모두 옳다고 말할 때 아니라고 했던 이 한마디가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를 바꿔버렸다.


  우주는 여전히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우리는 케플러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눈이 한껏 넓어졌다. 그야말로 정말 신의 영역을 넘본 진정한 과학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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