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
똑같은 하루여도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늘 있다.
윙윙 거리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2시 30분. 한여름도 아닌데 뜬금없는 모기라니. 모기를 피해 잠자리를 거꾸로 바꾸어 보았는데도 윙윙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스탠드를 켜고 모기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스탠드의 불빛이 덜 미치는 곳에 앉아있는 모양인데 잠결에 모기를 수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을 켜 놓고 어제 읽다가 잠든 책을 펼쳤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벽에 붙어 있는 모기를 발견하고 날쌔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를 마셨는지 벽지까지 붉게 물들었다. 많이도 먹었네. 모기를 내리칠 때 착~ 붙은 손의 느낌이 경쾌해서 하마터면 그 새벽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기는 이틀이나 밤마다 우리 잠을 방해했던 것이다. 겨우 모기 한 마리였지만 큰 짐승 사냥이라도 한 듯 성취감이 있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출근길 정차한 도로 옆 나무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새들이 단체로 움직이는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나무에 은색 사다리가 걸쳐있었다.
누군가 나무 위로 올라가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작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데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좋겠다. 잎도 떨구고, 나뭇가지 정리되면 추운 겨울 땅속 깊은 곳으로 에너지를 모아놓고 푹 쉴 수 있을 테니. 나는 이번 겨울 잘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글날 글씨왕을 선발하겠다는 이벤트를 벽에 써붙였는데 제법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내가 맡은 6학년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다 벽보를 본 4학년 5학년 아이들 여럿이 심사 지를 써서 가져왔다. 네모칸 가득한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써 내려갔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책 속의 구절을 쓰라고 했으니 어떤 문장을 쓸지 고민했을 테지. 우리 반 아이들을 보니 [긴긴밤], [불량한 자전거 여행] 등 감성 풍부한 여학생들이 그동안 꼭꼭 숨겨두었던 문장들을 써서 제출했다. 학교행사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 재미있으라고 아이디어를 내고 시간과 돈을 들였다. 퇴근하자마자 다이소에 가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사러 갔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고른 것은 스티커를 붙여서 꾸미는 필통과 다꾸용 롤테이프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할까를 고민하는 내 모습이 꼭 산타할아버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예쁘게 만든 칭찬카드와 함께 건넬 생각을 하니 나는 기분이 좋은데 아이들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모기를 잡으며 느낀 쾌감과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부러워하는 마음,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고르는 작은 기쁨. 이 작은 순간들이 그냥 지나쳐 갈 법도 한데 지금 이 시각까지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글을 써서다.
글을 쓰면서 가장 크게 변한 점은 머리와 마음속에 순간의 감정을 사진 찍어 둔다는 점이다. 무심코 지나가다 퍼뜩 어떤 문장 하나가 떠오를 때도 있고, 이만 팔천 번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에서 정확하게 딱 꽂히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다. 그때의 나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종이 위에 펼쳐 놓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글을 쓴다. 하루를 살면서 글쓸거리가 생겨나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다. 유레카를 외친다.
하지만 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텅 비어도 쓸 것이 없고, 마음이 꽉 차도 쓸 수가 없다. 매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글을 쓴다는 작가들이나 정해진 양을 매일 같이 쓰는 작가처럼 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글쓰기는 좋은 것이구나를 맛본 어린 글쟁이일 뿐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내가 엄마가 되듯, 다시는 엄마가 아닌 삶을 살지 못하듯. 이제 나는 글을 쓰는 글쟁이가 되어 다시는 글을 쓰지 않는 삶을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되었다. 마흔을 훌쩍 넘어서야 만난 나의 삶의 가장 큰 변화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