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 어딘가에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크다. 아무리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하더라도 모든 일과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한숨 돌리면 더없이 편안한 느낌이 든다. 좋다고 나가서 놀았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 역시 집이 최고야.’
몇 년 전 집을 이사하게 되었는데 인테리어 공사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3개월 간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단기 임대가 가능한 거주지를 구하거나 호텔 장기 투숙도 고려해 봤지만, 짧은 기간인데 그냥 어떻게 버텨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 나와 아이들은 친정으로, 남편은 본가에서 얹혀 지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에너지 넘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캐리어 2개에 단출하게 꾸린 짐만으로 친정 엄마 방 한 켠에서 3개월을 버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 원가족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불편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남편과 상봉하여 근처 모텔을 잡고 네 식구가 살 부비며 함께 잠들고 다시 헤어지곤 했다.
15년 간 집보다 더 오래 붙어 있었던 나의 일터가 있었다. 밤을 새거나 주말에도 나와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기에 나의 일터가 내게 주는 애착은 굉장히 컸다. 전 직원 12명의 아주 작은 회사였다가 수년에 한 번씩 사무실을 넓혀 나가며 나중에는 제법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갖게 되었을 때에는 내 손으로 일군 회사라는 생각에 뿌듯해 가슴이 뛰기도 했었으니까. 그런 곳이 하루아침에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남의 회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회사에 찾아가면 너무나도 당연스레 출근하는 기분이 든다. 마음으론 정리가 되었는지 몰라도 몸이 그렇지 않은가 보다. 여느 날처럼 주차를 하고 14층을 눌러 내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가 앉아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켤 것만 같다. 내년 봄에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한다고 하니 그때가 되면 이런 기분을 떨쳐낼 수 있을까.
때로는 나의 공간이 집뿐이라는 것도 꽤 쓸쓸한 일인 것 같다. 나의 일터가 사라지고 나의 공간을 더 정성껏 꾸몄다. 마침 인테리어를 할 수 있게 되어 하고 싶던 컬러와 디자인, 조명, 소품 등을 내 마음대로 배치하고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집이 만들어졌다. 그 안에서라면 늘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주로 집에서만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불쑥불쑥 공허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매일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지. 힘들어 죽겠다며 집에 눌러앉아놓고 이제 와 또 딴소리를 하니 말이다. 너무 예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참 좋았지만, 어떤 날엔 이 집에 아주 잘 어울리고 기능 좋은 가전제품 정도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남편도 아이들도 각자의 스케줄이 많아졌고 집은 잠시 들러 한숨 돌리거나 퇴근 후 몸을 쉬이는 공간이었고, 난 그때마다 그들을 맞이하는 집의 일부 같은 느낌.
그런 내게 얼마 전 또 다른 나의 공간이 생겼다. 매일 마음 편히 출근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도 되는 사무실. 내 이름이 떡 하니 쓰여진 캐비닛도 있었다. 동료들도 생겼다. 누군가는 내게 오랜만에 일 하려니 힘들지 않냐 말을 한다. 물론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배워나간다는 게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힘들지는 않다. 불안함과 걱정도 많지만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도 크다. 때로는 심리 상태가 주는 긍정의 힘이 물리적인 에너지 소모를 뛰어넘는 것 같다. 아직 정식 출근도 하지 않았고 내 회사라는 생각도 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을 각자의 위치로 보내고 나도 단장하고 집을 나설 곳이 생겼다는 것에 마음이 참 좋았다.
이러고 있는 게 잘 한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실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발길 가는 대로 해보자 마음 먹고 살고 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 발걸음의 무게가 유지된다면 좋겠다. 나의 두 번째 일터에서 또 다시 과거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