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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ul 23. 2023

겁 없이 시작한 방문교사 첫 수업의 기록

폭우 속 멘붕

2023년 7월, OO아파트 OOOOO호 앞.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쉬고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아직 입에 익지 않은 말, "안녕하세요~ OOO 교사입니다."


나의 첫 수업이었다. 아이의 얼굴도 모른 채 교재만 수없이 들춰보며 혼잣말로 수업 연습을 했더랬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다행히도 밝은 얼굴로 맞이해 주는 꼬마 아이와 엄마. 가볍게 인사하고 연습했던 대로 시작하면 되는데 자꾸만 멈칫거리며 엉거주춤해하는 나 자신이 너무 어색하다. 애써 태연한 척 아이와 자리에 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는 이제 겨우 네 살. 언어 발달에 지연이 있어 언어 치료를 하는 중인데 이 수업이 아이들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다행인지 이 아이도 오늘이 첫 수업이다.


쉴 새 없이 떠들며 2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수업이 어땠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별 다른 문제 없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또다시 태연한 척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휴~

겨우 한 집, 20분 수업에 이렇게 긴장을 하다니... 이제 막 시작했음에도 이 일이 익숙해지는 지점은 어디쯤일까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


사실 본격적인 수업은 둘째 날부터 시작되었다.

방문교사의 어려움 중 가장 큰 부분은 스케줄이다.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수업을 해야 하기에 동선과 시간표를 잘 짜야하며 시간이 딜레이 될 경우 줄줄이 사탕으로 수업에 차질이 생긴다.

차례차례 4개의 집을 연달아 방문해야 하는 실전이 시작된 사실상 첫날.


첫 번째 집.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아이

엄마도 아이도 친절하고 수업태도도 너무 좋은 아이였지만, 6과목을 1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이끌어가야 하는 수업이었다. 한 과목 당 10분 정도 내내 전주 학습을 점검하고, 이번 주 학습의 핵심 내용을 짚어 주고 학습 계획을 세워주어야 한다. 순서도 엉망에 빼먹은 내용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시간은 왜 이리 순식간에 흐르는지 시간도 오버되었다. 부랴부랴 수업을 마무리하고 두 번째 집으로 향한다.


초등학교 6학년 여자 아이

"안녕하세요~" 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보지만 엄마도 아이도 무표정한 얼굴로 웃지 않는다. 너무나도 무거운 분위기에 사소한 대화를 건네보지만 이 또한 별 다른 대답이 없다. 국어 10분, 수학 10분. 몇 가지 더 설명해주다 보니 이런, 시간은 더더 오버가 되어있다.


다음 학생은 차를 타고 15분 정도 운전해서 이동해야 하는 거리. 이미 수업 시간은 지나고 있는데 폭우가 미친 듯이 쏟아진다. 이미 곳곳에 호우경보가 내려졌다. 폭우 속 컴컴하고 꽉 막힌 도로, 게다가 초행길이라 허둥지둥 겨우 집을 찾아 주차를 하고는 튀어 올라갔다.


예쁘장한 네 살 아이와 예쁜 엄마가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오늘 이 아이와 한글과 수학을 15분씩 가르쳐야 한다. 오늘 내가 가르쳐야 할 글자는 "스", "드", "그", "트" 4글자. 수수께끼를 내며 아이의 집중을 끌어 본다.

"고슬고슬 맛있게 볶은밥을 그릇에 소복이 담고~ 그 위에 노오랗게 부친 계란 옷을 덮으면 어떤 음식이 될까?"

오므라이스의 "스"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오므라이스를 모른다. 책의 그림을 보여줘도 모르는 음식이란다. "응~ 이건 오므라이스라는 거야~ 오므라이스의 스!"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건 알겠지.

"포크로 국수 면을 돌돌 말아서~~~" 스파게티를 설명하는데 스파게티도 모른다고 한다.

드레스를 자꾸 원피스라 하고, 트라이앵글은 알 턱이 없다.


유아 단계의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에 글자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사물 인지'를 먼저 수업한 후 글자 학습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몸소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고 겨우 겨우 한글 수업을 끝마쳤다.


이어서 수학 시간. 아이에게 오른손과 왼손을 알려줘야 한다.

"OO이 밥 먹을 때 무슨 손으로 먹지?"라고 물으니 이번에도 모른단다. 그래도 여러 번 더 물으니 오잉~ 왼손을 든다. 몇 번 더 확인하고 왼손에 스티커를 살짝 붙여주고 "이 손이 왼손, 반대쪽은 오른손이야~" 하고 얘기하고 왼손, 오른손을 들어보자 하니 아이는 왼손등 위에 붙여진 스티커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요지부동으로 멈춰 버렸다. 스티커를 떼고 싶단다. 스티커를 떼고 아까 스티커를 붙였던 손이 왼손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나의 횡설 수설에 아이는 더욱더 혼돈의 늪으로 빠져 버린다.

안 되겠다. 그냥 책의 그림을 보면서 따라서 들어보라 해야겠다. 교재에는 아이가 바라보는 방향과 같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그림의 인물들이 모두 등을 보이며 서있다. 그림에 보이는 그대로만 손을 들면 된다고 말했더니, 아이는 빙그르르 뒤로 돌아서 손을 들어 보인다. 등줄기와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정신이 반쯤 나간채로 쩔쩔 매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근데 누구세요?"

이미 수업이 시작된 지 20분은 더 지났을 시간이었다. 그렇지... 웬 모르는 아줌마가 앞에 앉아 왼손 오른손 거리고 있으니 아이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응~ OOO 선생님이야~ 우리 오늘 오른손 왼손을 배워볼 거야~" 하고는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더 바짝 다가가 "왼손~ 오른손~"을 외치다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든 아이의 얇고 날카로운 손톱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베인 듯이 쓰렸지만 아이의 놀란 얼굴을 보고 괜찮다~ 진정시키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이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 이마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수업을 끝내고 나와 거울을 보니 이마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하.. 이제 겨우 첫날인데 자꾸만 헛웃음만 새어 나온다.


네 번째 집.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

우리 둘째랑 같은 학년이기에 집에서 가르쳤던 경험을 떠올리며 편안하게 수업을 시작했는데...

아이가 끊임없이 수업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어디서 봤던 일, 들은 일... 하... 아이의 말을 똑똑 잘라먹기가 어려워 시간이 많이 허비되어 버렸다. 그래도 세 번째 집보다는 나았지 생각하며 수업을 마치고 일어서 나오는데, 아이 엄마가 다가와 이야기한다.

"OO이는 이번 달까지만 수업하고 그만할 생각이에요"

첫날부터 휴회라니... 당황스럽지만 침착하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 거세진 폭우를 뚫고 운전을 하며 계속 웃어댔던 것 같다.

익숙해지는 날이... 언제쯤 올까. 난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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