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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09. 2024

착한 여자 '선희*'를 위하여

꿈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




꿈 제목 -  나전칠기장과 선희
꿈 이미지 - 나전칠기장, 문양, 큰장, 작은장, 아내, 새 냉장고, 이사, 아이스커피 컵, 이름, 선희, 장모, 동기의 아내
꿈 감정 - 의문, 연민, 불행, 화남, 변화

태반 속 웅크린 태아처럼 깊은 숙면 속 꿈. 이사를 앞둔 아내가 검은색 바탕에 반짝이는 조개껍질로 문양을 낸 검은 나전칠기장을 집안에 들여 놨다. 노인은 이 장을 얼마나 애지중지 닦았을까. 선명한 무지개빛 문양을 유심히 살펴본다. 큰장과 작은장이 두 개의 방에 각각 들어와 있다. 아내는 처음 보는 디자인의 새 냉장고도 주방에 들여놨다. 나는 이사가면서 들여놓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빨리 샀느냐고 묻는다.

아이스커피를 담았던 플라스틱 컵을 손에 들고 어느 낡은 건물 계단을 오른다. 투명한 컵에는 '선희'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다. 내 고교 동창의 아내 '선희'를 떠올린다. 내 아내의 대학동기이기도 한 '선희'. 아내의 엄마 이름 '선희'. '선희'라는 이름에서 강렬한 불행의 기운을 느낀다. 나는 계단 구석에 컵을 내려 놓는다. 불행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집으로 들어가 아내가 들여 놓은 중고 칠기장을 보았고, 아내에게 화를 낸다. 아내의 변명의 말들은 점점 기어들어가다가 멈춘다.




정착민과 유목민

"너희들 언제까지 전세로 살 거니?", "딸을 외국으로 내보내고 걱정이 되지 않니?"

나는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서 은행에 고스란히 갖다주는 게 싫다고 둘러댄다. 늙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세상 편한 소리한다고 부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모는 정착하라 하고 우리 부부는 이를 거부한다. 더 이상 정착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무겁고 소중히 다루어야 할 나전칠기장은 정착민에게나 맞는 물건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정착은 지나간 과거에서 현재의 의미를 세심하게 닦아내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우리 부모 세대의 삶의 방식이었다.


"제주도에서 3년, 강원도에서 2년, 런던에서 1년... 각자 살고 싶은 곳에서 적당히 살아 보자. 살다가 외롭거나 필요할 때 다시 합쳐서 살아 보는 거지." 부부는 이런 말을 농담처럼 너무도 쉽게 했다. 그 영향을 받았을까, 딸은 스무 살이 되면서 이미 노마드를 선택했다. 나는 중년에 집을 나왔다. 각자 어디로 가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완전히 해체된 건 아니다. 정신의 결속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느낀다.)


꿈에서 아내가 들여놓은 새 냉장고보다 노인의 나전칠기장에 시선이 끌리는 걸 보면 삶의 방식에 변화를 희미하게 감지하고 있는 걸까. 부부는 새로운 일을 벌이려는 중이다. 그것이 정착이든 아니든, 물리적 생활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필요하다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생활을 가볍게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정착민의 '안정'보다 유목민의 '자유'에 더 끌리는 사람이란 사실을 안다.




착한 여자 '선희(善/喜希熹嬉)'

우연일까. 잠을 깨고 '글로리(교사 글쓰기 모임)'밴드에 유진이 선희(나는 모르는 그녀의 친구)를 만났다는 글이 올라온다. 일면식도 없는 '선희'라는 이름이 입안에서 뒹군다. 착한 여자 선희, 그래서 더 슬픈 이름 선희 . 선희라는 이름 속에는 자아가 없다. 딸을 얼마나 착하게 키워서 한 영혼이 피폐해질 때까지 빨아먹으려고 이름으로 낙인해 놓았을까. 이름 지은 자를 혐오한다. 그래서 나는 착한 이름 '선희'가 싫다.


'선희'라는 이름에서 아버지라는 가부장의 염원을 읽는다. 현명한 엄마이면서 배려심 많은 아내가 되라는 남자의 이기심이 깃든 이름. 내가 아는 '선희'들은 하나같이 착한 여자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선희'들은 자기 욕망이 '주머니 속의 숨길 수 없는 송곳'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오기도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뾰족한 욕망의 끝점이 보였다. 정착민들이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희생제의적인 이름이 내겐 '선희'였다.


'선희'들은 착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와 내부에서 나쁜 여자이고픈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여자들이었다. 나는 선희들이 나쁘게 살아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아버지와 당당하게 맞짱뜨는 악녀이기를 바랐다. '선희'는 아버지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가 지어놓은 '착한 여자'의 대표이름이다.



*'선희'는 장모의 실명이고 사위로서 보고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 특정 이름에 대해 비하하거나 혐오의 마음이 담긴 글로 읽히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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