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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10. 2024

통증은 통찰의 시간이다

꿈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





꿈 제목 -  암퇴치 캠페인
꿈 이미지 - 귀가, 도로, 여대생, 캠페인, 팬던트, 암퇴치, 무반응, 내 자동차, 위암, 생명, 존재, 병
꿈 감정 - 자부심, 실망, 던져짐, 외로움, 무시, 섭섭함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시티세븐 앞길을 막아선 한 무리의 젊은 여학생들이 보인다. 무슨 캠페인을 하는 모양인지 팬던트를 들고 내 차 쪽으로 걸어 오고 있다. 나는 장사꾼들은 아니라는 판단으로 차창을 열고 그녀들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설명은 분명하지 않고 어눌했다. 말해야할 중요한 정보는 숨겨둔 채 길고 불필요한 말만 하고 있다. 그냥 가려는데 암퇴치 운동을 하고 있으니 싸인만 하고 팬던트를 받아가면 된다고 했다.

암이라면 내가 할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더냐. 싸인을 하고 몇 자 적어줄 생각으로 차에서 내렸다. 나에게 설명을 하던 여학생에게 나는 암에 대해 할 말이 많이 있으니 크고 특별한 펜던트를 가지고 오라고 농담을 건내고 기다렸다. 그녀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펜던트 뭉치를 뒤적거리며 찾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에게는 어떤한 반응도 오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은 자기네들 끼리 수다떨기에 바빴다. 자기네들이 여기에 왜 있는지, 암에 대한 어떤 목적 의식도 없는 하루 때우기 아르바이트생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 보니 나를 위해 올려 놓은 팬던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의 진지한 감정이 무시되었다는 생각에 더 이상 거기에 있어야 하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내 차를 찾았다. 그제서야 그녀들은 나의 뒤통수를 향해 다급하게 붙잡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 간다. 걸으면서 속으로 외친다.

"너희들이 암이 무엇인지 알아?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들어보거라. 암이란 퇴치해야할 불치병이 아니란다. 암은 생명이 있은 이후부터 있어온 것이란다. 그렇다면 생명이 이 지구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친구 같은 운명을 지닌 병라는 것을..."




약자

죽음의 사선을 넘어온 자들의 무용담은 끝이 없고 그것들에는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가 그러했고, 암에 걸렸다가 완치 판정을 받은 내가 그랬다. 암을 치료하면서 내가 지독한 '관종'이었음을 보게 되었다. 표출되지 못한 자기 존재에 대한 갈망이 암과 함께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자기를 방치한 댓가는 혹독했고, 나를 지켜내야 한다는 보호 본능이 작동했다. 의학적으로 '완치'라는 용어를 썼지만, 완전하게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가 아니기에 스스로를 '표나지 않는 장애'라는 표현을 썼다. 보호받고 싶었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관심이 싫지 않았다. 내가 타인의 인정과 보호를 이렇게나 받고 싶은 인간이었다고? 이인증세를 보이는 환자처럼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약자'가 맞는지 계속 의심하고 되물어야 했다. 암을 '뒤로 물러나 있음'에 대한 변명으로 삼는 건 아닌지, 이제 몸이 회복되었다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했다. 최소한의 욕망에 만족할 줄 알아야 했고, 최대한 느리게 속도를 절제해야 했다. 암이 내게 가르쳐 준 건 '균형'과 '조화'라는 미덕이었다.




통증

전문의도 내 통증과 공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통증을 막연한 1에서 10까지 중 수치화 해서 대답하기를 요구했다. 나는 10의 통증이 어떤 것인지 몰랐으므로 그때마다 대답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순간순간의 통증은 매번 10을 갱신했다. 몸의 통증이 이럴진대 무너진 마음의 통증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표현할 방법을 몰라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열심히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통증과 죽음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타인의 통증과 죽음은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통증이나 죽음 그 자체보다 그것을 오롯이 혼자서 치루어내야 한다는 절대고독에 있다. 암은 타인에게는 퇴치해야할 캠페인의 팬던트 정도의 가치다. 암은 나만의 유일무이한 팬던트여야 했지만, 타인에게는 그저 피하고 싶은 질병일 뿐이다. 암진단이 확정되기 전까지 암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암에 걸리자 죽음이 삶의 한 가운데로 끌려나왔다.


죽음을 직시하면서 자유로워졌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사랑을 회복해야 했다. 적절한 자기애와 기댐, 타인에게는 이해와 허용의 시간으로 채워져야 했다. 사랑을 할 때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게 된다. 자신이 자유로워져야 타인을 이해하는 지평이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고통과 죽음의 개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과 자유였다. 사랑과 자유의 가치는 암이 내게 가르쳐준 철학적 사유의 선물이었다.


'무위(필명, 나는 위 전체가 없다.)'는 장자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위암이 가르쳐준 철학이었다. 위암이 '소요유逍遙遊'로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삶의 속도가 느려졌고, 삶의 목표보다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 되고난 후 장자를 접했다. 나는 이미 장자와 함께 '소요유'하고 있었다. 어떻게 위암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장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통찰

암은 자기가 키워낸 자기 증식의 돌연변이 세포이다.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방식으로 증식해서 정상 세포들을 파괴한다. 암은 자기 파괴의 병이다. 외부 환경에서 침투한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점에서 치료가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외부에서 투입되는 어떤 약물과 외과적 수술도 그 근본적 치료책이 될 수 없다. 암은 개체 내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고, 지극히 개별적이고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암에 대한 치료는 개체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이 무슨 무책임한 말이냐할 지 모르지만, 암에 대한 정확한 인식 전환에서 암 치료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암환자가 백만 명 있다면 백만 개의 암은 모두 다른 병이다. 편의상 생긴 부위에 따라 간암, 위암, 폐암... 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다. 암은 돌연변이 세포가 이상증식하는 현상이다. 똑같이 위장에 생긴 암이라 하더라도 각기 다른 세포체다. 그러니 백만 가지의 치료제가 필요한 병(최근에는 유전자 표적치료가 나왔다. 이것은 암의 개별성에 관한 근본적 통찰에 따른 결과이다.)이다. 현실적으로 암을 정복하기 불가능한 이유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된 데는 돌연변이들이 각기 환경에 적응하여 자리잡아 간 흔적들이다. 생물의 다양성은 돌연변이 세포들이 진화한 결과다. 암은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질병이지만, 생물의 진화론적 입장에서 보면 다양성과 분화의 씨앗인 셈이다.


암은 치료와 박멸에 목적을 두는 순간 인간은 같이 죽어간다. 암은 치유와 공존의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 치유에 성공한다면 암은 선물이 될 수 있고, 공존의 원리로 이해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암은 두려워 해야할 질병이 아니라, 삶을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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