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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11. 2024

죽은 자가 남긴 것

꿈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




꿈 제목 - 영면 일기
꿈 이미지 - 제자, 영면, 일기, 어미니, 손글씨, 안치실, 냉동고, 온기, 필사, 동생
꿈 감정 - 두려움, 오열, 온기, 냉기, 슬픔

어느 제자의 영면 일기,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대신해 전달해 주었다. 너무 또박또박 예쁘게 정성들여 쓴 글씨체에 감탄하며 한참을 들여다 본다. 혹시 제자의 일기 속에 나의 잘못이 기록되어 있는지 두렵기도 하다. 나는 제자의 일기를 읽다가 오열한다. 다 읽지 못한다.

일기에는,
"나는 영면했다. 안치실로 옮겨졌다. 옆에 먼저 들어온 시체가 새 친구가 들어오니 냉동고가 따뜻해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여기는 춥다. 곧 따뜻해질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인의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일기를 천천히 또박또박 필사한다. 남자에게 일기 내용을 물었으나 묵묵히 열심히 옮겨 쓰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형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이...




카데바Cadaver

이상한 꿈을 꾼 이유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죽은 후 내 시신이 카데바로 기증 조건에 부합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잠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가 없는 정상적이지 않는 신체를 가졌다. 아니다. 위가 없는 상태로 30년 이상(몇 년을 더 살지 모르지만, 기대수명일 뿐, 벌써 10년을 살았으니 20년 정도는 남았을 거다)을 산 사람의 장기와 근육 상태를 관찰할 수 있는 훌륭한 의학교육 자료가 되지 않을까.


더 이상 생명이 기능하지 않는 육체의 물질성은 어떤 의미일까.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온기와 냉기의 차이다. 교육용으로 기증된 죽은 육신이 의사의 날카로운 메스로 섬세하게 부위별로 분해된다. 물질의 형태가 잠시 분리되었다가 불 속에서 산화되어 최종적으로 다시 우주의 원소로 되돌아간다.


인간의 존재성은 살았을 적, 일부 사람들의 기억이라는 관념 속에 잠시 남아 있다. 그것도 기억하던 사람마저 죽으면 기억도 모조리 싹 사라진다. 생명과 죽음의 선은 극명하지만(물론, 산 자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식), 우주의 시간 속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상태다.


의사들이 행하는 의료 행위 또한 죽음의 시간을 잠시 보류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의료행위를 교육시키기 위한 카데바가 되는 것이 보람일까. 이것은 살아 있을 때 잠시 미리 당겨 쓴 한 조각의 보람일 뿐이다.




일기

내가 죽기 직전 일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일에 나는 왜 이렇게 집착하는가. 나는 잊기 위해서 일기를 쓰고, 지인에게는 잊지 말아달라고 쓴다. 죽음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잊혀진다는 것은 존재가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태초, 우주 탄생 이전 상태와 같은 완전한 무無. 한 인간의 죽음은 하나의 우주가 소멸하는 거대한 사태이다.


죽음은 물성物性이 지배한다. 내 일기는 최초 온라인 상에서 떠돌아 다니는 0과 1의 데이터 상태로 탄생('에버노트'라는 어플리케이션 회사의 서버에 저장된다)했다. 물성이 없는 상태의 기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버의 고장이나 오류로 인해 일 순간에 싹 사라지는 끔찍한 사고가 걱정되어 책으로 물성이 있는 존재(가장 안전한 백업 방식은 역시 아날로그다)로 바꾸어 놓는다. 만지고 볼 수 있다는 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 문제가 되는 것은 물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내 영정 앞에 일기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조문 온 사람들이 뒤적이며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읽고 있다. 내가 생전에 써놓은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페이지를 읽고, 웃다가 울다가 한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에서 재생되므로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다. 기록은 기억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기록은 시간이 삭제되고 공간이 사라졌음에도 그 시점, 그 장소에 우리를 생생하게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육신이 태워지는 소각로 속에서 일기가 함께 태워지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고, 그 전에 내 정신과 육체가 살아있을 때 내 손으로 모두 태우고 떠날 것이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다. 내 삶은 스스로가 거두어들이고 떠나야 하니까. 꽤 낭만적이고 멋진 제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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