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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16. 2024

딸기 전쟁

꿈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




꿈 제목 - 아버지와 딸기
꿈 이미지 - 아버지, 이웃집 부역, 검붉은 노지 딸기, 스테인레스볼, 무르고 못생긴 딸기, 이슬, 바람, 태양, 벌과 나비, 통통한 뱃살
꿈 감정 - 그리움, 해학, 부성애父性愛, 미움, 용서, 이해, 사랑

"얘들아, 딸기 먹어라!"

아버지가 이웃집 일을 도와주고 노지 딸기를 얻어 왔다. 스테인레스볼에 담긴 딸기는 내가 흔히 알던 예쁘게 잘 익은 빨간색이 아니다. 크기가 제각각에, 눌리고 짓무르고 찌그러져 있다. 온전한 모양을 가진 예쁜 딸기는 하나도 없다. 누나보다 내가 먼저 달려가 받아들고 딸기 하나를 내 입 안으로 집어넣는다. 맛없게 생겼지만 맛이 달다. 달다고 생각한다. 애써 맛있는 척하며 먹는다. 하우스에서 재배한 것이 아니라, 노지露地에서 이슬 맞고 자란 것이라서 맛이 있다. 벌과 나비의 통통한 뱃살이 꽃가루를 옮겨주어 열매를 맺게 했을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듣고 태양의 온기를 충분히 받고 자라서 맛이 좋다. 아버지의 고된 노동이 담겨 있어서 딸기 색깔이 검붉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딸기는 '부정父情'이나 '부성애父性愛'가 아니라, 물색없는 아버지의 '동심 파괴'의 이미지다. 그런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딸은 딸기를 너무 좋아한다. 나 또한 딸기를 더 많이 좋아한다.


간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나지 않아 잠을 깨고도 누운 채로 뒤척인다. 아마 어제 딸 방에 잠시 들어갔다가 책상 위에서 발견한 딸의 메모지를 봐서 이런 꿈을 꾼 게 하닐까 한다.


"간밤에 꾸었던 기억나지 않는 꿈을 그리워하다"  - 딸의 포스트잇 메모.




S#1. 딸기와 부부싸움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 하나가 있다. 정확한 내 나이는 알 수 없다. 부모에게 들어서 상상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기억하는 건지, 실제 장면에 관한 기억인지는 나로서는 확인 할 길이 없다. 장면은 생생하다. 어쩌면 꿈속의 장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건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분 좋게 가족 외출(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나, 동생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걸로 보아 아마 5세 이하의 기억으로 추측한다)을 하고 귀가하는 길에 귀한 딸기를 사서 집으로 왔다. 아마 나의 생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생일 선물로 아버지에게 권투글러브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언쟁 끝에 엄마와 아빠는 부부싸움을 했다. 화를 못이긴 아버지가 딸기가 담긴 바구니를 벽에 던졌다. 하얀 벽지 위에 들러 붙었던 딸기들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딸기가 검붉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 건지 내가 운 건지 모르겠다. 틀림없이 나는 울었을 것이다. 부부 싸움이 무서워 운 게 아니라 딸기가 뭉개져서 울었다. 누나는 아빠 엄마 싸우지 말라면서 울었지만, 나는 딸기가 아까워서 울었다.


"내 딸기, 엉엉, 내 딸기, 엉엉엉... 불탕한 내 딸기 으으으..."

나는 울면서 벽에 붙은 딸기를 떼어 먹었다. 딸기는 달았다.  울면서 딸기 먹는 내 모습에 부부는 싸움을 멈추었단다.




S#2. 딸기와 입덧

"딸이 딸기를 저렇게 좋아하는 건, 뱃속에서 딸기 못먹은 한이 맺혀서 그런 거야."


딸기가 나오면 아내가 놓치지 않고 하는 말이다. 아마 평생 갈 것이다. 좀처럼 후회할 일을 잘 만들지 않거나 후회 자체를 하지 않는 내가 후회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아내가 첫 아이(딸)을 임신했을 때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딸기의 계절이 끝나고 여름 과일이 나올 무렵이었다. 어디가도 딸기를 구할 수 없을 거라 단정하고 지금 어디서 딸기를 구하겠느냐고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내였다면 백방으로 알아보고 뛰어다녔을 것이고, 어쩌면 진짜 구해 왔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처음부터 어떤 노력의 체스쳐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상심의 포인트였다.


그 시절 나는 물색없는 남편이었다. 나름 세심하고 디테일한 남자라고 자부했었는데 순간의 방심이 불러온 후폭풍은 가늘고 길게 갔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내 아버지가 생각없이 저지른 잘못과 내가 저지른 실수는 '딸기'로 되물림 되었다. 그래서 가끔씩 꿈에 나타나는 건가 보다. 그래도 딸기는 여전히 맛있다. 딸기가 나오는 철이면 딸과 나는 서로 많이 먹겠다고 '딸기 전쟁'을 치른다. 동심 파괴의 죗값을 혹독히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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