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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도르 Jul 03. 2019

당신의 일방적 요구를 거절합니다

할수는 있어, 물도 안마시고 화장실도 안가고 일하면^^

일 시키지말고 부탁해줄래

디자인업계의 농담중에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디자이너가 맞는다'는 말이 있다. 그 옛날 실리콘밸리가 붐을 이루고 디자이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한국의 대학에도 너나 나나 디자인과를 신설했다. 그리고 몇년만에 공급과잉이 된 디자이너들이 대학 담벼락을 부수고 사회로 쏟아져 나왔다.


어릴때부터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동경하고 꿈꿨지만 막상 되어본 디자이너는 왜인지 모르게 갑을병정 중 '정' 같았다. 대학을 갓 졸업 했을때부터 약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찜찜함, 이게 바로 '정'의 느낌일까.


인하우스 디자이너라면 어떻게든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암묵적인 갑을병정 관계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일을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이 되다보니 한쪽은 일방적인 요구를 하게되고 다른 한쪽은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면서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게다가 일을 부탁하러 오는 입장에서 그 일에 대한 작업시간과 일정까지 이미 판단하고 말을 꺼낸다.


"이거 진짜 급한건데, 오타만 수정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니까 바로 좀 해주세요"


회사에서 눈치보는걸 싫어해 없는 일도 찾아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유연하지 못한 나는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급하다는 일을 대부분 처리해주는 편이었다. 짬내서 해주고, 친해서 해주고, 짬밥으로 해결해줬다. 내 딴에는 한두번 일하고 말 사람들이 아닌, 오래 함께 갈 동료들 이므로 하던것도 멈추고 재빨리 그들의 아쉬움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기꺼이 해결해주면 대부분 다음번엔 "더 빨리"를 요구한다. 기꺼이 빨리 처리해줬던 경험은 그들에게 '감사'의 카테고리가 아니라 '이용'의 카테고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내 몸은 하난데 급한사람은 한두명이 아니다. '갑'인 대표부터 갑의 '을'인 중간관리자들, 그리고 함께일하는 동료들 조차도 '병'이 되어 서로 자신의 일부터 처리해달라고 요구한다. 화장실을 가려다 앉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려다 끊기고, 꼭 사야할것이 있어 핸드폰을 보다가 구매버튼을 누르지 못해 내일로 미룬다. 결국 몇주에 한번꼴로 옥상에 올라가 삼십분 정도의 소심한 잠적을 하곤 한다.  


디자인의 'ㄷ'도 모르는 갑을병들이 수정을 지급하게 요구하고 그 작업의 간단함을 침 튀기며 피력할 때마다 나는 고민했다. 그냥 "정"으로서의 본분을 다 할것인가, 진짜 갑은 작업자임을 상기시켜 줄것인가.


일을 의뢰한다는 것을 시키고 요구해도 되는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회사 안에서의 우리는 모두 협업의 관계이지 일을 요구하고 받아들이는 관계가 아니다. 건강한 협업은 상대의 일정과 나의 일정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법을 찾고 '타협'하는것이다.


일을 가지고 오는이의 접근법이나 태도가 '일방적 요구'이냐 '협업'이냐에 따라 일은 다르게 진행된다. 디자이너이자 과장이 된 지금 나는 예전처럼 급한 일들을 고분고분 처리해주지 않는다. 10년이 넘게 급한일을 처리해주다 보니 그 중에 정말 급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업의 태도와 거절에 대한 부연설명을 늘상 달고 사는일은 썩 유쾌하지 않을 뿐더러 정말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 "오늘은 제가 바빠서 바로 해드릴수 없구요, 다음부턴 팀 일정부터 체크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열이면 열 이렇게 대답한다. "제 껀 진짜 간단한건데, 제꺼부터 딱 30분만 먼저 하고 다른거 하시면 안돼요?" (응 안돼^^)


회사 안에서의 나는 대기하고 있다 동료들의 급한 용무를 바로바로 처리해주는 수정대기반이 아니다. 애초에 타인의 일정은 안중에 없는 태도로 일처리를 부탁 하는것은 상대의 입장에서는 '부탁'이 아니라 '요구'처럼 들린다. 나는 당신의 일방적인 요구를 오늘도 거절한다.

"오늘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일정말고 작업자의 일정부터 체크해 주세요"




쓰는 아도르

사진,글,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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