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빠살이] 아내를 위해 귀촌하고 아이를 위해 오픈한 셰프 아빠
이국땅에서 꿈을 좇은 지 여덟 해. 기어코 꽃이 피려는 찰나, 모든 걸 내려놓고 귀국길에 오른 아빠가 있다. 아내를 따라 호주 시드니에서 충북 옥천군으로 귀촌 한 셰프 아빠 배만석 씨 이야기다.
살면서 길을 일찍 찾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갔지만,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청춘이 태반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최소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부모님이 맞벌이 셔서 밥을 직접 차려 먹는 일이 많았는데, 밑반찬에 밥만 놓고 먹고 싶지 않았어요.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게 좋았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음식 만들어 먹는 게 좋았어요.”
어릴 때부터 요리가 좋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진 않았다. 그는 '성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진 않다. 자연스럽게 요리사를 꿈꿨다. 하지만 대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 그는 꿈을 잠시 놓아야 했다고 말했다. 바로 취직을 해서 요리사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평탄한 삶을 살길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직 어렸던 그때는 거스를 수 없었다.
“지금은 연예인처럼 대우받는 세프도 있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식당에서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직업으로 인식됐어요. 그래도 저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을 안 가려고 했어요. 대졸이 아니어도 요리사로 취직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평범한 직장인이 되길 바라셨어요. ‘대학은 나와야 뭐라도 된다’라고 항상 말씀하셨거든요.”
부모님이 바라는 ‘직장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군대도 가야 했고 다른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진로를 두고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 일단 대학을 가고 꿈은 그 이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단정하다.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다. 말투 또한 간결하고 명확하다. 제대한 지 15년이 훌쩍 넘었지만, 칼각은 아직도 날카로웠다. 눈빛에 아직도 군인 냄새가 배어있다.
“해군 부사관으로 4년 넘게 복무했어요. 요리 말고도 직업군인이나 건축 같은 전문직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비록 학과는 성적에 맞춰갔지만, 군대는 제 의지로 다녀왔습니다.”
그는 주도적인 성향의 사람이다. 스무 살이 되고 부모의 품을 벗어난 이후 진로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자신이 내렸다. 해군 부사관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첫 도전이었다.
“일 자체는 만족스러웠어요. 그런데 한 달에 25일 정도 배를 타다 보니 삶의 질이 피폐해지더라고요. 게다가 복무 당시 서해교전(제2 연평해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더욱 힘들었어요.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삶이 만족스럽지 않더라고요. 내 길이 아니다 싶어 군대에 말뚝을 박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제대 후 곧바로 복학했다. 학업에 집중하려 했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이 또한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동시에 잠시 접어뒀던 요리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렸다.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우선 업계에서 경험을 쌓기로 했어요. 그래서 한식을 하는 식당에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직원이 30~40명 정도 되는 제법 큰 회사였어요. 주방장이 저를 보더니 대뜸, ‘학교 잘 다니지 왜 일하려 하냐?’라며 탐탁지 않아했어요. 아무래도 주방 일이 많이 힘들기 때문에 며칠 일하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거든요. 저도 그럴 줄 아셨던 거죠.”
휴일은 한 달에 딱 두 번, 그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쉬는 시간도 없이 일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꿈꾸던 일이었으니 얼마나 재미있었겠어요. 나중에 회사 경연진이 새로 오픈하는 매장에 파트 헤드급을 맡아보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어요. 그때가 29살이었는데 빨리 인정을 받은 셈이죠. 그런데 거절했어요. 헤드급 역할이란 게 다른 게 아니라, 일은 헤드처럼 해야 하지만 대우는 그대로였어요. 식당이 커서 관련 시스템을 배우긴 좋았지만, 무엇보다 삶의 질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빨리 선택해서 나온 게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여러 이유로 퇴사를 했지만, 꿈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요리가 '천직'임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공부하고 싶었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외국에서 요리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유학 자금은 없었어요. 외국에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당시에 부사관으로 복무하며 모아 둔 돈이 조금 있었는데, 그걸로 비행기 티켓을 사니 약간의 생활비가 남더라고요. 부모님 도움이요? 20살 이후부터 혼자 지내면서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왔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렇게 얼마 안 되는 돈을 쥐고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호주에 도착해 주방보조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틈틈이 어학 공부도 병행했다. 처음부터 요리 학교를 다닌 건 아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익히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2년여간의 워킹홀리데이 시절. 그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을 했던 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멜버른에 위치한 농장에서도 일을 했었어요. 오렌지, 만다린, 귤 같은 걸 따는 일이었죠. 함께 일했던 외국인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어요. 그때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지만, 술만 마셔도 너무 잘 통했어요. 처음 느껴본 여유롭고 따뜻한 분위기였어요. 그 경험들이 너무 좋았어요. 어느 순간 '지금 이 상황에서 생활이 조금 더 안정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힘을 빼고 살아도 되는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 거죠. 사실, 제대하고 나서부터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일만 했어요. 하고 싶은 일을 기어코 해내고 말 거란 생각만 했어요. 경주마처럼 멀리 있는 목적지만 보면서 직진했어요. 여유란 없었죠. 그래서 정작 주변을 못 보고 살았어요. 시선이 좁았죠. 제겐 그때가 처음으로 세상을 넓게 보게 된 날이었어요.”
그는 시드니에 있는 요리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학기 중에는 20시간을 일할 수 있게 해 줬다. 생계를 위해 식당 일은 물론 새벽 청소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업을 통해 셰프로서의 역량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3년 반 동안 학교에서 공부하며 일을 병행했습니다. 요리는 물론 경영까지 배웠어요. 졸업할 때 즈음에는 동료들은 물론 저 스스로도 ‘이젠 셰프야’라고 인정할 만큼 성장했어요. 하지만 가장 크게 얻은 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와 넓어진 시각이라고 생각해요. 호주에서 얻은 제 인생의 깨달음이죠.”
그는 아내를 호주에서 만나 결혼했다. 혼자 힘으로 이국땅에서 억척같이 일하고 공부해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 닮았다. 부부가 된 둘은 밤잠을 줄여가며 일했다. 그의 아내는 쓰리잡까지 뛰며 돈을 벌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셰프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아내 역시 최고 연봉을 받으며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호주 영주권도 발급 바로 전 단계까지 진행됐다. 고생 끝에 낙이 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병원이었어요. 간호사가 페이스톡으로 전화를 했는데, 응급실에 누워계신 장인어른을 비춰주더라고요. 아버님이 천식이 있으셨는데, 급성으로 숨이 많이 차서 병원에 오신 거라고 했어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2~3번 더 오셨다고...”
원래부터 호흡기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해지셨는지는 몰랐다고 했다. 혼자인 아버지가 크게 걱정이 된 아내는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갔다. 천식 환자는 건강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옆에서 챙겨줄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3달 정도 후에 아내가 다시 호주로 돌아왔어요. 그리곤 1달 안에 한국으로 완전히 들어간다고 통보를 하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일이었죠. 고민이 많았어요.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았는데 다 내려놓고 가는 게 쉽지 않잖아요? 처음에는 가지 말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쨌든 자기는 갈 테니 저 혼자 호주에 남아서 영주권을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는데 후회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는 후회하기 싫었다. 만에 하나 장인이 잘못되셨을 때, 아내가 후회한다면 그도 너무 후회스러울 것 같았다. 호주에서 이뤄놓은 것들을 모두 두고 가야 하지만, 이제는 가족과 아내가 우선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결단했다.
“귀국한 이유 중에는 호주 생활에 대한 권태감도 있었어요. 보통 영주권을 받고 나면 그 이상 기대할 수 있는 삶이 없거든요. 계속 같은 일상의 반복이죠. 그래서 술이나 약에 빠지는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그리고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서의 한계도 존재했어요. 회사로 치면 가장 높은 직급까지 셰프로서 진급하고 싶었지만 유리천장이 있었어요. 물론 계속 호주에 있었으면 돈은 더 벌 수 있겠지만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권태기를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아내죠. 아내가 후회하면 저 역시 후회하니까요.”
그의 한국행 소식을 들은 주변 지인들은 ‘아깝다’며 만류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영주권도 나오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호주에서 영주권 취득은 이민자들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가 다녔던 직장 동료들은 조금 다른 덕담을 건넸다.
“‘당연히 부모가 우선이다. 참 잘 한 결정이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결심을 해줘서 내가 고맙다.’고 말해줬어요. '더 함께 하고 싶지만, 제 결심에 응원을 보낸다'는 마음이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더 아쉽고 미안하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격려 속에 그는 8여 년의 치열했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내를 따라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정착했다. 장인어른이 계신 곳이다. 시드니라는 대도시에서 살다가 작은 시골 마을로 귀촌한 것이다. 아내에게는 고향이었지만, 그에겐 낯선 타지였다. 하지만 적응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사는 곳이 고향이란 말이 있잖아요. 제가 그런 것 같아요. 호주에서 살 때도 고향이라고 생각했고, 옥천도 마찬가지라고 느끼고 있어요. 그리고 귀국한 첫해는 그런 생각조차 안 날 정도로 그냥 재밌고 좋았어요. 양가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도와드리면서 보냈거든요.”
3분 거리에 온갖 편의시설이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살다가 한적한 시골로 왔지만, 그는 갑갑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 호주 농장에서 일했을 때 느꼈던 그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져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외국에서 힘들게 자리 잡은 아들이 돌아오자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부모님의 반응이 조금 상처였다고 고백했다.
“호주에 갈 때도 그랬지만, 저는 부모님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20대 때부터 계속 혼자였고,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호주에서 생활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 생각만 한 거죠. 그런데 호주에서 살다 보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때가 있더라고요. 호주 사람들도 특별한 날에는 친지들을 모두 불러서 파티를 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부모님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멀리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전화를 드리긴 했지만, 너무 먼 거리여서 자주 뵙진 못했어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귀국길에 오른 그의 마음 한켠에 있었지만, 아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가 야속했다. 하지만 작년 여름, 천사 같은 딸아이가 태어나면서 이 모든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복덩이다.
“귀촌해서 얻은 가장 큰 행복이 바로 예지(16개월)에요. 호주에 살 때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서 아이를 갖자고 했었거든요. 잠을 포기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었어요. 당연히 아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죠. 하지만 옥천에 오니 모든 게 평온해졌어요. 아내는 물론 저도 마음이 안정되더라고요. 물론, 아직 경제적으로 아직 자리를 잡진 못했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이를 계획했습니다.”
옆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시간은 지나고 나이는 드는데 자리는 언제 잡고 아기는 언제 낳아 키우지?'란 고민을 호주에 살면서 항상 했던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이 문제도 옥천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식당을 오픈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어요. 귀촌한 다음 해에 대전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일을 했어요. 예지가 태어난 후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고 싶어서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퇴사를 하고 내 가게를 차렸습니다.”
‘돈보다 가족이 행복한 삶’을 찾아 한국으로 돌아온 그다. 그리고 셰프라면 자신만의 가게를 갖는 게 최종 목표이기도 했다.
2019년 7월 말, 옥천군 이원면에 양식집 '러스틱참'이 오픈했다. '소박한', '투박한'이란 뜻의 러스틱(Rustic)과 '매력적인'이란 뜻의 차밍(Charming)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파스타, 퓨전덮밥, 햄버거, 스테이크 등을 판매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게 분위기가 이름처럼 따뜻했다. 그가 살고 싶은 삶이 식당 이름과 원목 테이블 같은 소품 곳곳에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옥천군에 파스타집이 몇 개 없는데. 특히 이원면에서는 제 가게가 유일해요. 좀 뜬금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런 점이 독특해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밥집 옆에 또 국밥집이 생기면 전혀 새롭지 않잖아요.”
그는 사람들에게 시골에서도 파스타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쁘고 화려한 요리도 좋지만, 그보다 음식 본연의 맛을 알리고 싶어 했다. 한마디로 ‘멋 보다 맛’이다. 특별히 홍보도 하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음식에 대한 그의 진심이 손님들의 마음에 닿은 것이다.
“제 가게를 차리고 보니 개인 시간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처럼 브레이크 타임이 되면 아내, 아이와 함께 가까운 곳으로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있어요. 가족을 위해 이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것 같습니다.”
호기롭던 젊은 시절, 그는 뜨거운 꿈 하나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갖은 고생 끝에 목표가 궤도에 오르려던 찰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귀촌을 결단했다. 그리고 아빠가 된 지금은 아이를 위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저는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호주에서의 경험을 통해 어떤 삶이 행복한지 잘 알고 있거든요. 만약 돈을 좇았다면 호주에 남았을 거예요. 그래서 귀촌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 아이의 교육이 문제가 된다면 다시 도시로 돌아갈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너무 이쁘잖아요. 적어도 아이가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빠로서의 바람은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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