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과 사기와 온갖 범죄들이 매일 뉴스를 장식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범죄자를 비난한다. 그런데, 때로는 피해를 당한 사람까지도 비난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비난한다. 때로는 습관적으로 비난한다. 어떤 이는 비난에 중독되기도 한다. 비난은 비난의 대상뿐 아니라 비난하는 나 자신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비난하는 까닭을 한번 살펴보자. 깊이 살피면 비난할 것이 없고, 비난이 멈추면 마음이 편해지고 좀 더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삶을 깊이 보고,
사람들을 깊이 보고,
나 자신을 깊이 보니,
세상 비난할 사람이 없더라.
혹시나 이 글을 잘 못 오해하거나, 불쾌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간다. 여기서 말하는 논점은 범죄자나 나쁜 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좋다 나쁘다 토론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 글은 비난의 본질을 깊이 살펴보기 위함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비난의 본질을 바로 보게 도와서 비난이 멈추도록 안내한다. 오해 없기를 바라고 또 다른 비난의 길로 빠지지 않기 바란다.
법을 어긴 범죄자나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어겼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주변에서 보거나 뉴스에서 들으면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비난한다. 의지가 약하다고 비난하고 원래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악마라고 비난한다.
누가 봐도 나빠 보이는 사람을 비난하는 건 당연해 보이는데, 때로는 피해자까지도 비난한다. 피해자까지 비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비난의 민낯을 보기가 쉽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선 중기의 환향녀다. 병자호란 당시 국가가 지키지 못해 청나라로 붙잡혀 갔다 온갖 고생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반기거나 감싸 안아주기는커녕 정절을 잃었다고 모욕하고 비난하는 일이 허다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2차 가해를 가하고 자신은 비난의 방패 뒤에서 구차한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정작 비난하고 맞서 싸워야 할 강자는 놔두고 이미 피해를 입어 약해질 때로 약해진 약자를 비난한다.
누군가를 비난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뭘까? 도덕적 우월감일까, 아니면 비겁함에 대한 자기방어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따지지 않고 대중의 비난 대열에 휩쓸린 무지함일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스트레스를 푸는 습관일까?
비난이 기댄 믿음들을 살펴보라.
살펴서 그 믿음들이 공함을 보면
더는 비난이 일지 않는다.
비난의 본질은 그 사람의 행동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나의 믿음이다. 행동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의도적인 자유의지로 비난받을 나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쁜 일은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정해진 사회적 기준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즉, 정해진 선과 악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정해진 선과 악이 있을까?
우리는 비난하면서 너무나 당연히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가만히 살펴보자.
깊이 구체적으로 돋보기를 들이대어 보고, 또 뒤로 물러서서 인류가 지나온 긴 역사의 시간을 크게 보고, 우리 사회를 벗어나 세계로, 그리고 지구 전체로, 더 뒤로 물러서 우주 전체를 크게 보며 살펴보자. 그리고 시선을 180도 돌려서 이 모두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깊이 살펴보자. 그러면 비난의 본질을 깊이 살펴볼 수 있다. 이 본질을 깊이 보면 비난이 멈춘다. 여기, 비난 당하는 이와 비난하는 이를 모두를 품는 옛 성인들의 사랑과 지혜가 있다. 비록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을지라도 비난은 멈출 수 있다. 싫어는 하되 증오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의 영혼까지 갉아먹는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난은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일이다. 깊이 살펴 비난이 멈추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의 문이 열린다. 세상과 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삶과의 갈등도 줄어든다. 또한, 비난의 뿌리는 죄책감의 뿌리와도 같다. 비난이 멈추면 죄책감도 멈춘다.
가만히 살펴보자.
비난의 기준이 되는 정의, 법, 도덕적 기준을 가만히 살펴보라. 정해진 기준이 있는가?
먼저 가까이 돋보기를 들이대어 보자.
법은 정해져 있다. 절차를 통해 사회적 약속으로 정하고 문자로 새겨 놓았다. 그러면 이것이 정해진 것인가? 문자를 읽고 적용하는 과정은 정해질 수가 없다. 일어나는 사건은 늘 새롭고 독창적이다. 그래서 법을 해석해서 개별 사건에 적용하도록 따로 절차를 만들어 판결한다. 판사의 개인적 해석에 따라 판결하기에 정해진 법은 정해지지 않는 판결을 만든다. 그래서 사실 정해진 법은 없다. 아무리 판례를 따른다고 하지만, 판사에 따라 무죄가 되기도 하고 유죄가 되기도 한다. 판사가 아니라도,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든 변호사나 검사의 능력과 재량에 따라 무죄가 되기도 하고 유죄가 되기도 하고, 유죄는 징역 1년이 되기도 하고 무기징역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감형 사유를 들이대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도 한다. 때로는 유무죄를 결정하는 판결에서 피의자의 의도나 범행 증거의 제시에 따라 유무죄가 결정되기도 한다. 아무리 봐도 범죄자가 틀림이 없는데 결정적 증거가 충분하지 못해서 무죄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이것은 재판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많은 사건이 경찰의 수사나 검찰의 기소 여부에 따라 상식적으로 분명한 범죄자임에도 재판에 가지도 않는다. 이렇게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에도 정해진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서 살펴보자.
어떤 법도 시간에 자유로운 법은 없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죄라고 여기는 법은 정해진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기껏해야 몇 십 년, 몇 백 년이다. 지금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문제가 예전에는 전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 허다하다. 예전에 비난받았던 문제가 지금은 당연한 권리로 보호받는 일도 허다하다.
어떤 법도 장소에 자유로운 법은 없다. 너무도 당연히 한 곳에서는 죽어 마땅한 죄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죄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는 돌팔매질을 당할 만큼 큰 도덕적 문제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 같은 행위라도 누군가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종종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사기꾼이 구속되는 뉴스를 접한다. 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해서 구속이 됐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기꾼이 구속된 이유는 힘이 없어서다. 사회적 권력이 없어서 구속됐다고도 볼 수 있다.
사기의 정의는 "고의로 사실을 속여서 사람을 착오에 빠지게 하는 범죄행위이다." 이 정의를 적용해 볼 때 세상에는 수많은 사기꾼이 있다. 그런데 구속되는 이가 있고, 기소는 되나 무죄를 받거나 기소유예가 되는 이가 있고, 아예 기소도 되지 않는 이가 있고, 비난은 받으나 법적 문제로 엮이지 않는 이가 있고, 비난도 받지 않는 이가 있고, 심지어 세상의 동경을 받는 이도 있다. 분명히 사기 행위를 하는데도 결과는 각양 각색이다.
서양 중세에 유명한 면죄부 사건은 종교 개혁 이후에 쓰인 역사를 배운 우리에게는 명확히 사기다. 돈을 내고 구입한 증서에 이름을 적으면 죽어서 혹시 갈지 모르는 연옥의 형벌이 면해져서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가톨릭교회에서 사람들을 속여 돈을 갈취한 사기다. 지금 우리가 볼 때는 사기 범죄지만 당시 종교적 믿음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행위였기에 범죄가 되지 않았다. 범죄는 누군가 심판하는 사람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데,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의 사기행위는 그 자신이 심판자이기에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권력을 쥔 자들은 죄가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고의로 사실을 속여서 착오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흔하지만 그것이 권력을 쥔 사람들이 하는 행위이거나 그 권력을 바탕으로 이미 시스템적으로 꾸준히 일어나게 만들어 놓았으면 사기 행위는 맞으나 '범죄'행위가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기는 세상의 사회, 종교, 문화, 정치 전반에 녹아 있다. 우리가 사기라고 인식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행위가 우리를 속이며 일어난다. 이런 일을 반대하고 세상에 알리려는 이들은 때로는 철저히 힘으로 짓밟히거나, 때로는 반대로 권력을 쟁취해서 속인 이들을 범죄자로 규정하고 처단한다. 하지만 다시, 권력을 가진 이들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조금 더 물러서서 살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할 때 쓰는 기준은 짧은 기간에, 좁은 장소에서, 작은 수의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주의 시간에 비해서 정말 찰나 같은 순간이고 우주의 광대한 장소에서 정말 점과 같은 작은 장소이고 지구에 사는 온갖 생물의 숫자에 비해서 너무도 작은 수의 사람들이 설정한 기준이다.
가만히 물러서서 보면 정해진 기준이 없다. 온갖 법의 이름으로,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심지어 신의 이름으로 갖다 대는 기준을 뒤로 물러서서 살펴보면 다 공허하다는 사실이 보인다.
가까이서, 또 멀리서 살펴보아서 비난이 기대고 있는 기준의 공허함을 바로 보면 비난은 자연히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난이 멈추게 된다.
다시 가까이 가서 돋보기를 대고 살펴보자. 이번에는 돋보기의 방향을 반대로 '나' 자신을 살펴보자.
누군가를 비난할 때는 '나'는 그러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거나 실수하기 쉬운 일이라면 비난 대신 연민이 들 것이다.
삶을 오래 살수록 내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다 보면 "나는 그러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 알 수 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도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이때는 내 스스로 다양한 이유를 만들어 변명을 대며 나를 용서하고 상대의 비난에서 나를 방어하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비난하던 똑같은 이유로 어쩌다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면 자세히 알지도 못한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 억울해 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사정을 들어 항변할 것이다.
비난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고 때로는 "저 나쁜 사람은 타고난 악마야!"라며 비난하기에 이른다. 원래부터 정해진 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오래지 않은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비난의 대상을 악마나 마녀로 규정하고 처형해 왔다. 하지만, 나를 방어하는 변명들을 상대에게 적용하다 보면 비난할 것이 없다. 비난의 대상을 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으로 바꾸면 비난할 것이 없다. 비난 대신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방어하게 된다. 갑자기, 세상의 비난을 받는 이가 알고 보니 내 아이라면, 당신은 아마 발 벗고 나서서 그 비난을 방어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운전 같은 작은 일상의 일에서부터 삶에 일어나는 심각한 일들에게까지 적용된다. 개인을 넘어 사회적으로 큰일이거나 국가 간에 일어나는 심각한 일이라고 다르지 않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비난에 대한 자세가 달라진다.
이렇게 가만히 보면 비난은 시점에 달려있다. 내가 비난의 주체인지, 아니면 비난의 대상인지에 따라 비난에 대한 자세가 바뀐다. 비난의 기준이 시점에 따라 바뀐다. 이 사실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해진 비난의 기준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예수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질 수가 없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렇게 바로 알아듣고 비난을 멈추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비난을 멈추기 바란다.
비난하는 소리, 내가 먼저 듣는다.
칭찬하는 소리, 내가 먼저 듣는다.
비난이 멈추면 내가 편안하다. 비난은 대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는 일이다. 이 부정적인 에너지는 비난하는 내 안에 있다. 비난하면 상대방이 듣는 동시에 내가 듣는다. 왜 굳이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 안에 키울 필요가 있을까? 기왕이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면을 보라.
대부분은 비난하는 습관이 들어 있다. 오랜 시간 든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비난이 마음에 일 때마다 가만히 비난이 기댄 믿음을 살펴보라. 이 글의 안내를 표지판 삼아 가만히 살펴보다 보면 비난이 사그라질 것이다. 굳이 상대를 용서하거나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그저 비난이 기댄 믿음이 공허함을 보고 알아차려 비난이 멈추면 된다.
비난하는 이의 마음에는 상대적 우월감이 있을 수 있다. 비난의 대상보다 내가 낫다는 우월감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비난하는 사람들은 서로 비난을 공감하며 다수를 이루고 비난의 정당성을 확인한다. 이미 다수가 비난하고 있는 일에 끼어들어 같이 비난하면 비난은 더 쉽다. 힘 있는 다수에 끼어 우월감을 확보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만일 당신이 이 비난의 대열에 끼어 있다면 빠져나오라. 다수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바란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늘 자신에게 향할 수 있다. 비난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모든 비난이 기댄 믿음의 공허함을 보면 비난은 사라진다. 비난의 대상이 타인이든 자신이든. 비난의 본질을 바로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도 멈춘다. 자신에 대한 비난은 죄책감이다. 죄책감 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작은 죄책감이라도 마음에 심어지면 행복한 일상을 찾기 어렵다.
이전 글 "자세히 오래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걸.."에서 나태주의 <풀꽃> 시를 소개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보통 비난의 화살이 나를 향하면 다양한 이유로 방어한다. 내가 비난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굳이 이 글에서 안내하는 믿음의 공함을 보지 않아도 다 나에게는 그런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 왔기에 비난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잘 안다. 설령 잘 못한 걸 인정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과 그럴 수밖에 없도록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이 있다.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 내가 그렇고 다른 이도 그렇다.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비난받아서 마땅하기 보다, 내가 그 사람을 자세히 오래 보지 않아서이다. 누군가를 자세히 오래 보면 이해하게 된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진 않을지라도 최소한 상대에 대한 비난은 멈춘다.
내가 누군가를, 또는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면 그건 비난받아 마땅해서가 아니라 내가 더 가까이 좀 더 오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오래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를 비난하며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이처럼 비난은 상대가 아니라 비난하는 사람의 문제다. 좀 더 가까이, 오래 보지 못한 나의 문제다.
삶을 깊이 보고,
사람들을 깊이 보고,
나 자신을 깊이 보니,
세상 비난할 사람이 없더라.
타인을 향한 비난이든 나를 향한 비난이든 그 비난의 뿌리가 같기에 예외 없이 모든 비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정도가 어떠하든 비난의 뿌리는 같기에 저 정도는 정말 악이라며 비난에서 예외를 두면 비난은 다시 자라난다. 예외가 있다면 다시 살펴보라. 깊이 살피면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오해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도 아니다. 원수라고 비난하는 내 믿음들을 살피는 일이다.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깊이 그리고 넓게 보라.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비난할 것이 없다.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자세히, 오래 깊이 보라.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비난할 것이 없다.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깊이 보라. 삶도, 다른 사람들도 결국 나 안에 있다. 나에 대한 이해가 온전해지면 어떤 비난도 일지 않는다.
깊이 보라. 그러면 비난할 것이 없다.
그러다 또 마음에 비난이 일면 곰곰이 비난 밑에 깔린 믿음들을 살펴보라.
시간을 가지고 깊이 보면 다시 알아차린다. 비난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비난하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서
행복을 가로막는 비난이 멈추길 바란다.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발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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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이들은 책의 다음 부분을 보면 글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2장 "찾음의 시작"에서 비난의 바탕이 되는 다양한 믿음을 깊이 살펴보니 읽어보기 바란다. 찾음의 시작에 이런 기본적인 믿음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세상에 만연해 나도 모르게 물들어 버린 다양한 믿음에서 벗어나는 일은 찾음의 첫걸음이다.
책 "반야심경의 비밀,"에서는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구부정(不垢不淨)"을 설명하는 글에서 비난의 바탕이 되는 믿음의 전제들이 모두 예외 없이 "공(空)"하다고 말하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살핀다. 선과 악, 좋고 나쁨은 보는 이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가치다. 깊이 살펴보라. 어디 정해진 것이 있는가?
가치는 오직 바라보는 이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 세상이다. 상대적 세상 안의 모든 것은 세상을 보는 당신의 시점에 따라 정해진다. 대상은 아무 말이 없다. 가치는 대상에 있지 않기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원래부터 선하고 악한 것은 없다. 원래부터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대상에는...
"누가 좋다, 나쁘다 하는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부디 도움이 되길.
P.S
글을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 이해를 돕고자 몇 마디 덧붙인다.
이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비난"이라는 단어를 "비판"과 다른 개념으로 썼다. 궁극적으로 비난과 비판의 경계가 있겠냐마는 이 글에서는 다른 개념으로 전제하고 의도적으로 "비난"이라는 단어를 썼다.
비난은 잘 못된 믿음을 전제로 하여 다른 이의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나 비판은 다른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비판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치고 자신의 의견이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이 글은 어찌 보면 비난을 비판하는 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비판" 하는 글이 아니라 비난 아래 있는 믿음들을 "가리키는" 글이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당신이 비난을 하고 있다면 그 또한 있는 그대로다. 이 글은 방향 표지판과 같다. 모든 스승의 가리킴이 그러하듯, 그저 길을 가리킬 뿐이다. 당신이 가리키는 길로 가든, 가지 않든 강요하지도 않고, 가리키는 길만이 옳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정상으로 가는 길에 도움이 될까 지나온 길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길을 가리킬 뿐이다.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