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난다.’
글을 쓰고 싶어서 자리에 앉았는데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아다닐 뿐 어느 것 하나 걸려 올라오는 것이 없을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기억이 난다.’로 문장을 시작한다. 일단 다섯 글자를 써 놓고 보면, 뱅글뱅글 돌던 소재들이 멈춘다. 그때 아무 녀석이나 먼저 걸리는 녀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된다.
사실 이 방법은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처음 알게 된 방법이다. 생각보다 내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모든 인생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짧은 다섯 글자를 통해서 깨닫는다.
다섯 글자를 써 놓고 보면 왜인지 과거 내가 경험했던 일들, 최근에 글감으로 써보고 싶었던 것들이 머릿속 넓은 공간에 아주 크게, 그러면서도 한눈에 다 들어오도록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글자를 써 놓고 보면 그전에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머뭇거리던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해지고, 무엇이든 골라 글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글쓰기에 여러 가지 팁이 있지만 나는 이 방법을 가장 자주 쓴다. 살짝 응용하면 얼마든지 더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다. ‘기억이 난다.’가 아니라도 ‘웃음이 난다.’ 혹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뭐 이런 식으로도 충분히 응용이 가능하다. 내 삶은 온통 글쓰기 소재로 가득 차 있다. 잘 쓰지 않아도, 거창한 경험을 담아내지 못해도 상관없다. 글샘이 마르지만 않는다면, 물의 맛이 어떻든 목을 축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테니 말이다. 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기억이 난다. 처음 제주를 밟던 날이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29살 늦깎이 신입사원이었다. 군 복무하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28살 전역 직후에 마음이 급했다. 본격적인 공개채용 시즌이 시작하기 전 겨울에 짧게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봄 시즌 채용공고가 올라올 때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서류 접수를 시작했다.
서류 전형은 거의 학교 간판과 학점, 그리고 자기소개서로 판가름 나는 듯했다. 나는 변변한 인턴십 경험도 없고, 학교 간판도 고만고만했다. 학점은 졸업을 시켜준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다시 말해서, 취업 시장에서 나는 최약체 지원자였다. 자기소개서라도 ‘자소설’ 급으로 썼으면 모를까, 무슨 자신감인지 고집인지 있는 그대로 질문에 답변을 적은 뒤 몇 번 고치고는 휙휙 제출해 버렸다.
거의 전패를 당했다. 몇 군데라도 인적성 시험 보러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공통적으로 서류 전형에서 탈락할 줄은 몰랐다. 기업들 보는 눈이 비슷한 건지, 내가 서류상으로 아무 매력이 없었던 건지. 지금 생각하면 학점이 크게 발목을 잡았을 것 같다. 아, 평균 평점은 절대로 비밀이다.
29살 봄, 이맘때였다. 한참 지원하고 떨어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햇살은 쨍쨍했고, 몸도 건강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점점 불안한 마음이 되어 갔다. 지원과 탈락을 반복하며 개나리가 피었다가 벚꽃이 피었다가 모두 떨어졌다. 집에만 있으니 더 애가 타는 것 같아서 매일 아침 식사 후에 자취방 근처 신천 둔치를 달리곤 했다.
마지막 서류 결과 발표였다. 거듭된 탈락을 맛보고 있었던 터라,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다시 아르바이트하면서 시간과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해가 쨍쨍 내리쬐는 신천 둔치를 달리고 있었는데, 마지막 서류 전형 결과 통보가 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쉽습니다.’, ‘불합격하셨습니다.’ 같은 말이 없었다. 지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없었다.
짤막한 축하 메시지와 함께 다음 전형을 안내하는 문자 메시지였다. 최종 합격도 아니었지만 그날은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한껏 들뜬상태로 힘든 줄도 모르고 뛰어서 방으로 복귀했다.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다음 절차를 밟았다.
그러고 나서 한 번의 전형을 더 거친 후에, 면접 전형을 위해 제주 땅을 밟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기업 한 군데에서 받은 합격 통보였기에 참 소중했다. 대구에서 제주까지 거리가 어디라고 지금 생각하면 안 갔을 법도 한데, 그때는 전혀 피곤한 줄도 귀찮은 줄도 모르고 룰루랄라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전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다녀간 이후로 제주 땅은 처음이었다. 공항의 풍경은 낯설었지만, 취업이 될 거라는 기분 좋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루 일찍 도착해 사업장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일하게 될 곳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았다. 마침 군대 동기였던 친구가 제주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 친구 찬스를 써서 숙소를 구했다. 그 친구를 동지 삼아 내가 일하게 될 수도 있는 사업장을 함께 걸어 다니며 메모를 했다. 면세점이라곤 가본 적 없는 내가 취업을 위해 처음 면세점을 들어가 보게 됐다.
발음도 힘든 여러 브랜드들을 인터넷에 검색해 가며 발음을 외우고 무엇을 파는 곳인지 살펴봤던 기억이 난다. 화장품 냄새, 향수 냄새가 가득한 면세점을 한 바퀴 둘러본 이후에, 친구와 나는 숙소로 향했다.
그날 잠을 어떻게 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친구가 저녁까지 함께 있다가 돌아간 기억만 난다. 그 이후로 면접 예상 질문을 꺼내 한참을 읽고 또 고치고 하다가 잠이 든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아주 짧은 잠을 잔 이후에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다듬은 다음에 면접장으로 향했다. 숙소 체크아웃 후 면접장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기내용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마침내 캐리어가 망가져서, 여동생이 쓰던 핑크색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면접장은 면세점 건물이 아닌 다른 호텔에 마련되었는데, 면접장이 채 준비되기도 전에 도착했다. 멀뚱멀뚱 핑크색 캐리어를 들고 닫힌 면접장 앞에 기다리고 있노라니, 호텔 관계자인지 회사 측 면접위원들인지 모를 사람들이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긴장을 한 탓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면접은 오전, 오후로 나눠서 두 번 진행되었다. 1차로는 실무진 면접이었고, 2차는 임원 면접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걸 알아볼만한 여유도 없었다. 잔뜩 얼어서는 뽑아온 면접 예상 질문을 달달 암기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대부분 제주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는지, 다들 점심시간에는 따로 나가서 점심을 먹었다. 연고도 없고 갈 데도 없는 나는 점심시간에도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답변을 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훗날 내 입사 동기가 된 한 친구는,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 나는 긴장이 되어서 죽겠는데, 그 녀석은 어찌나 태연스럽고 여유로운지 아는 사람과 큰소리로 대화하면서 도시락을 두 개나 해치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인간은 100% 떨어진다.’ 뒷날 이야기지만 이 넉살 좋은 인간은 나와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산다는 건 이렇게 재미난 것이다.
면접장으로 들어가던 장면이 기억이 난다. 내 이름과 함께 다른 지원자 두 명의 이름도 호명되었다. 면접장으로 들어서면서 문을 내가 열었던 기억이 난다.
“앉으세요.”
면접관이 앉으라고 했던 말이 들려오고, 다른 지원자들이 내 말에 열심히 반박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뭐 실수했나?’
2:1로 공격을 한참 당하던 중에, 무슨 질문이었는지 어제 면세점에 다녀가면서 느낀 것들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쯤, 한 여성 면접관이 펜을 놓고 고개를 들어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기억이 난다. 그 면접관이 아주 노골적으로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긴장은 풀리고 어느새 희망이 되었다. 그때부터 답변이 술술 풀렸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아는 건 아는 만큼 대답했다. 두 차례 면접동안 네 분의 면접관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말을 잘 들어주셨다.
면접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 며칠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숙소를 구해다 주었던 친구를 만나 다음을 기약하고는 다시 대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제주를 밟던 그때로부터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나의 첫 회사는 이제 어느새 과거의 일이 되었다. 자격이 부족했던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었던 면접관, 나의 상사와도 이제는 함께하지 않게 되었다. 5년 전 그때는 지금 나의 5년 후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장 하나 남은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족과 친구들, 익숙한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에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해야 할까. 평생 부모님 도움 받으며 살았는데, 내가 나를 독립시켜 잘 데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 20대 후반 늦깎이 취준생은 가녀린 겨울철 가지처럼 부지런히 흔들렸다.
5년 뒤 나는 나의 전부였던 첫 직장과 이별했고, 두 번째 직장에 들어왔다. 고용되기 위해 스스로 목줄을 매었던 때가 첫 직장이라면, 지금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함께할 수 있는 직장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앞으로 5년이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나는 단지 한 치 앞, 그러니까 오늘내일 정도만 어느 정도 예측하며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마저도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말이다.
불안은 모든 인생의 동반자이다. 청춘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누구나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미래는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대 신입사원도, 30대 대리도, 40대 경력 있는 부장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불안을 친구 삼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불안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삶을 계획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삶과 아무 계획 없이 흐르는 대로 살고자 하는 그 어느 중간쯤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은 내 손에 다 잡히는 것이 아니기에 계획에 다 집어넣으려 하면 불안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버릴 것이고, 반대로 계획할 수 없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만 살면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배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답은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세상이 미덕으로 여기는 것을 나의 가장 우선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 본들 거기에 피앙새는 없다. 나는 내가 가진 씨앗만을 싹 틔울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나’라는 고유한 씨앗임을 아는 것, 그리고 나만의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 아닐까.
진정 실패는 사회에서 부와 성공을 거머쥐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진정 실패는 나 자신이 무슨 씨앗인지 싹 틔우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인생을 찾아내 살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인생이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며,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이기 때문이다.
제주는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처음 독립한 이곳에서 나는 아내와 결혼했고, 이제는 아내와 나 두 가족이 세 명이 되려 하고 있다. 이곳에서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꿈꾸고, 나도 나의 씨앗을 정성스럽게 길러 싹 틔우고 열매 맺게 하고자 한다.
혼자 맞던 수많은 어두운 밤을 지나,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삶은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다. 지금 열린 문으로 들어가며 끊임없이 문을 여닫는 삶의 연속일 테다.
쓰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 속에 푹 빠지는 것만으로 수년 전 처음을 떠올리며 기억에 잠길 수 있으니 말이다. 쓰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고, 그것 만으로 치유의 효과를 누린다. 글쓰기가 주는 유익은 역시 출간이나 인세, 또는 명성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떤 글을 쓰든, 책을 내든 내지 않든 당신은 글쓰기 그 자체로부터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 한 편의 기억을 글로 만들어 냈다.
공적인 글인지 사적인 글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발행을 했으니 공적인 글이 될 테다. 읽을만한 글인지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경험이나 글은 없으며,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기억이 난다.’로 시작해 글을 한 편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든, 타지를 떠나 살아온 한 인간의 이야기이든, 뭐 한 밤중에 타인의 일기장 한쪽을 들여다본 기분이든 어떻든 좋다. 나는 쓰면서 행복했으니,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따뜻했으면 좋겠다.
유치환 시인의 <행복> 한 구절을 내 멋대로 바꾸어 써 본다.
“오늘도 썼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