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내일 즈음 어처구니없이 죽을 것입니다

장애 여성 에세이

by 냐하

25.07.15 초안

넘어졌다. 화장실에서 물에 젖은 타일을 밟고 미끄러졌다. 벽에 머리를 찧어 혹이 났다. 좁은 바닥에 낀 채로 끙끙거렸다. 일어나지도 몸을 돌리지도 못했다. 큰소리로 시리를 불러 가족에게 전화했다. 십 분 정도 화장실 바닥에 방치되었다. 조난이었다. 그곳이 비록 내가 잠을 자고 씻고 밥을 먹는 집이어도 분명히 조난이었다.

정수리 왼쪽에 혹이 났고, 왼쪽 어깨와 갈비뼈가 뭉친 것처럼 아프다. 뒷목부터 이마까지 근육이 말라가는 점토처럼 굳었다. 팔꿈치의 살갗이 벗겨졌다. 한순간 왼쪽 귀가 멍했다.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통증들을 나열하면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죽을 것인지 죽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내일, 혹은 삼 주 후에 불쑥 죽을 수도 있다.

그건 그다지 슬프거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

질병 중 희귀난치병, 장애 중 지체장애.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설명해도 이것이 전부인 것 같다. 내가 가진 병의 증상을 설명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탄식을 뱉는다. 이해를 바란 적 없다. 아니, 있었지만 더이상은 없다. 다만 증상으로 핑계를 댈 뿐이다. 나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자주 근무를 빠질 수밖에, 아플 수밖에, 연차와 병가를 순식간에 다 허비할 수밖에 없다고.

고통은 전해지지 않는다. 심한 근육통이 오면 전신의 근육이 자갈이 되고 몸이 자갈밭이 된 것처럼 자잘하게 뭉치는 것 같다. 이렇게 적는다고 활자가 몸에서 실현될 리 없다. 정확한 언어는 결국 나에게 한정될 뿐이다. 감각 언어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고통은 고립을 수반한다. 나는 내 몸에 갇혔다. 그러나 갇힌 “나”는 무엇의 집합인가. 영혼이 몸에 갇힌다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몸이 영혼의 윤곽이다. 내 영혼은 비장애의 형상이 아니다. 나는 영혼까지도 불구다.

이것은 선언인가? 그럴 리 없다. 그저 인정한 것이다. 비장애의 몸 사이에서 장애를 가진, 즉 불구로써 기능하는 생활에 길들여질수록 나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몸뚱아리는 결코 독립할 수 없다. 멋있거나 아름다울 수 없다. 이런 몸으로나마 오래 살 수 없다. 한 사람의 몫을 해야 하는 모든 곳에서 불구의 몸은 그저 짐이다. 대부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들조차 말하고 잊는다. 그러나 불구에게도 뛰어난 기능이 있다. 자신의 몸의 역량을 아는 것. 자신의 몸과 환경 사이의 불화를 아는 것. 불구로서 나는 이제야 인정한다. 자본주의, 능력주의 등 이미 존재하고 선망받고 성찰 없이 대다수가 따르는 사회에서 나는 짐짝이다.

그것은 그다지 슬프거나 아픈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장소는 인간이 만든다. 대부분의 장소, 아마도 한국의 90%의 건물, 이동수단 등에서 나는 거부 당하고 있다. 놀라운 건 아무도 나를 거부할 목적으로 그렇게 만들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것이다. 불구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아는 사람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녀는 발달장애인이었고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았다. 여러 시설을 전전했다. 수도권의 한 시설에서 탈출한 후 현재까지 행방을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그녀에게는 정말 불임 시술과 시설만 필요했을까?

인간이 만드는 것은 장소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인간이 장악했고, 여전히 장악하려 한다. 개인을 넘어서 타인까지도 통제 아래에 두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내가 하루를 더 살지 모른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나에게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는데, 현재 약 N년을 더 살고 있다. 그동안 슬픔도 기쁨도 잔뜩 맛봤다. 하루를 더 살면 그만큼 기쁘거나 슬플 것이다.

자신의 집 화장실 바닥에서 싸늘하게 죽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계단 한 칸을 내려가다 무릎이 꺾여 나뒹굴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지에서 발목이 꺾여 턱을 바닥에 찧지 않을지도 모르고. 문을 열다가 작은 반동에 휘청거려 엉덩방아를 찧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변수를 통제하여 나는 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딱 하루만큼이라도 숨을 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이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없지만 그게 모든 것인 시설이 있다. 이동할 수 없어서 집안에서 활동보조사와 누워 사는 생활이 있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만으로도 괴로워지니까. 그러나 그게 상상을 포기하는 이유가, 정말 되나? 이미 있는 사람들을 상상에서조차 치워도 되는 걸까?

아마 누군가는 나를 생각하는 것을 괴로워할 수도 있다. 불쌍하게 여기고 연민할 수도.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우리”로 시작했다. 나도 나를 불쌍히 여기는 당신을 연민한다. 비장애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 믿는 당신을, 건강을 관리하면 당연히 젊은 신체를 가질 거라 믿는 당신을, 삶의 뒤죽박죽인 요소를 통제 가능하다 믿는 당신을 나 또한 연민한다.

불구를 친구나 동료로 삼지 않을 당신. 내일 살아 있을 거라 믿는 당신. 나는 당신의 친구로서 내일 함께 죽을 것이다. 수건을 밟고 미끄러져 뒷통수를 가구 모서리에 부딪혀서 죽든,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든 말이다. 당신이 상상하기 두려워하는 이유로 당신과 함께 죽을 것이다.

비장애의 몸을 가졌던 내 육체는 불구가 되어 수백 번 죽었다. 화장실에서 죽고 계단에서 죽고 평지에서 죽고 교통약자 택시에서 죽고 극장에서 죽었다. 불구가 되어 죽었고 어느 날 친구의 손에서 부활했다. 베리어프리가 안 된 서점에 디엠을 보내 따진 친구의 곁에서, 엘리베이터를 양보하지 않은 용산역의 시민들에게 화를 내는 친구의 곁에서, 점심시간마다 함께 밥을 먹어준 친구의 곁에서 분노와 슬픔과 얼떨떨함으로 다시 태어났다.

불구는 혼자 살 수 없다. 죽을 뻔하면 이 정도는 쉽게 인정할 수 있다. 누군가의 손에 죽을 때까지 길러진다. 모르는 사람들, 그들도 나의 친구다. 길거리에 엎어져 꼼지락거리는 불구를 일으킨 뒤 유유히 떠나는 백팩을 멘 남자와 목욕 바구니를 든 중년 여성은 나의 친구다. 케이티엑스에 오르지 못하는 내게 손을 뻗어 준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자 무리도 나의 친구다. 나는 그들과 짧게 만났고 그때 다시 태어나 여태 자랐다.

내가 죽는다면 그들과 함께 죽는 것이고 그들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은 비장하지 않다. 멀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다. 한국의 길거리에서 불구를 보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도 내일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 있다. 이건 저주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내일 일어나는 것과 죽어 영영 깨지 못하는 게 다를 바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