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가운데서 만난 현실과 꿈의 순간
옛날에 나는 참 젊고 당돌했어요.
그때는 세상 모든 진리가 철학 안에만 있다고 믿었지요. 헤겔 같은 철학자들의 글을 열심히 읽으면서, 나도 그들처럼 세상은 의식에서 시작된다고 굳게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토론이 내 열정이었어요. 누군가와 끝없이 논쟁하며 과감한 역설을 던지는 순간이 나를 가장 즐겁게 했거든요.
포스터의 소설 한 장면도 아직 선명하게 기억나요. 대학생들이 모여서 “풀밭의 소가 정말 존재하는가?”를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었죠. 어떤 학생은 “사람이 보지 않아도 소는 거기 있다”라고 했고, 다른 학생은 “아니야, 누군가 바라봐야만 존재한다”라고 했어요. 나는 그 이야기에 빠져서, 상상의 울타리 너머 소들을 불러내듯 밤새 이야기하고 웃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격렬하게 논쟁하지 않아요. 하지만 가끔 현실이 멀어지는 듯한 순간을 느끼곤 해요. 특히 여름이 찾아와 햇살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때 그래요.
그럴 때면 세상이 하나의 무대 같고, 사람들은 야외에서 열리는 연극 속 배우들처럼 보여요.
하얀 옷을 입은 여성들, 플란넬 셔츠를 입은 남자들, 장미 사이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마치 나비 같아요. 모두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속에서 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 물론 나 역시 같은 무도회의 한 사람일 텐데, 내 얼굴에 어떤 가면이 씌워져 있는지는 보이지 않으니, 마치 나만 구경꾼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여름날 정원에 서 있으면 모든 것이 현실이라기보다 신비한 연극처럼 보입니다.
장미와 양귀비, 초록빛 잔디,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움직이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동시에 금방 사라질 것 같아요.
가끔은 눈을 감는 것도 두려워요. 다시 눈을 떴을 때, 지금 이 찬란한 풍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까 봐요. 햇빛, 향기, 색채로 가득한 이 순간이 한순간에 멀리 달아나 버릴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정원을 바라보면서도 ‘정말 이게 현실일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어요.
마치 누군가가 잠시 보여주기 위해 무대 장치를 꾸며놓은 것 같고, 오늘 공연이 끝나면 내일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가끔은 정원 밖 마을을 바라볼 때 웃음이 나와요.
마치 이 세상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온갖 장치를 꾸며놓은 것 같거든요. 큰 나무 대문이 열리면, 마을은 금세 무대 세트를 옮기듯 새로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회색과 분홍빛 지붕이 있는 집들, 창가에 그려진 고양이와 강아지, 별빛처럼 반짝이는 들판과 반짝이는 도로… 모두가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 장치 같아요.
하지만 이런 장면들을 아무리 보아도,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믿기 어려워요.
“이건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여주는 거대한 낮의 꿈 아닐까?”
나는 그런 의심을 떨칠 수 없어요. 그래서 마치 혼자서 거대한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정교하지만, 동시에 너무 가볍고 덧없어 보여요.
그리고 이 여름의 한가운데서 나는 두 가지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는 깊은 숲 속에 들어가 세상은 허상이라고 믿으며 고요히 앉아 있는 철학자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대 위 화려한 공연을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아이의 세계예요.
햇살이 모든 것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여름날, 나는 철학자의 고요한 마음과 아이의 즐거운 마음을 함께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건 아주 단순해요.
여름의 가장 눈부신 날들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때로는 환상처럼, 또 하나의 무대처럼 바라보게 되지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기쁨과 고요한 조화가 있어요.
그 감각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가장 빛나는 순간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