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9. 스티로폼을 뚫은 뿌리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문득 사는 게 두려워졌다. 이 세상을 사는 게 너무 험난하게만 느껴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고, 나만의 교우관계를 만들어가는 이 일련의 과정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엄마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죽고 싶어."


그 어린것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단숨에 끝낼 방법이라는 건 알았나 보다. 엄마는 두 눈에 뚝뚝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다고 우는 나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후에 엄마는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네가 성장했다는 증거야"라고 말했더랬다.


최근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삶의 죽음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죽음도 생각해본다. 날이 추워 지자 손님은 뚝 끊겼고, 소상공인 지원정책은 애매하게 나를 빗겨나갔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카페 겸 서점을 하고 있으니, 카페가 장사가 안된다면 서점을 키우면 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손님들이 책을 주문하고 취소하길 반복했다.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보는 비율이 늘어난 탓이다. 책이 전자책 시장에 입고되면 바로 종이책을 취소하는 탓이다. 서점에 와서 책을 고른 후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그렇게 재고가 쌓이고 쌓이길 반복하자, 이내 인정하게 된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그 흐름은 당연한 것이며, 비난할 수도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이내, 끝끝내 인정하고야 만다.


유통기한이 지난 채 버려지는 음료들, 반품이 안되어 쌓여가는 책들, 그렇게 8평짜리 카페&서점의 공간이 점차 작아지고 또 작아지는 순간이 온다. 그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죽음, 이 공간의 죽음, 이내 내 삶에 미치는 소소한 것들의 죽음에 대해서. 나는 소비를 줄일 것이고, 취미를 줄일 것이고, 이내 삶의 무언가도 또다시 점차 줄여갈 것이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


코로나 이후 '식집사'가 유행이다. 식물 집사라는 뜻인데,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반려견이나 반려묘 대신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뜻한다. 나도 식집사라고 자칭할 만큼 식물에게 애정을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집에서 함께하는 식물의 종류도 많아졌다. 작은 화분에서 시작해서 점차 몸이 비대해지는 큰 화분들도 많다. 오늘은 마음먹고 극락조의 분갈이를 하기로 한다. 극락조는 최근 당근 마켓에서 3만원에 업어온 아이다. 이 극락조는 두 개의 뿌리가 한 화분에 심겨있다. 눈으로 볼 때는 풍성하고 웅장해서 그 매력이 있지만, 극락조는 좁은 화분 안에서 경쟁하느라 지쳤을테다. 오늘의 분갈이 목표는 이 두 아이를 분리하여 각자의 집을 만들어주는 거다.


깊고도 길게 뿌리를 내린 극락조는 화분에 단단하게 붙어있다. 절대 흙 하고 멀어지지 않겠다는 듯, 나는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듯 그렇게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나는 삽이 휘어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그리고 또 조심스럽게 극락조를 꺼낸다. 생각보다 긴 시간을 씨름한 끝에 극락조 뿌리의 끝이 보인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다.


화분 밑은 스티로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꽃집에서 대형화분을 팔 때 밑에 스티로폼을 넣곤 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흙을 조금 넣어 화분이 가벼워진다. 둘째, 물의 배수가 잘된다. 하지만 막상 실체를 발견했을 때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절반은 흙으로, 절반은 스티로폼으로 뒤덮인 화분 속에서 극락조는 생존했다. 영양가도 없는, 내 뿌리를 오롯이 품어줄 수도 없는 그런 스티로폼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아남았다. 흙처럼 포근하게 안아주지 않는 스티로폼을 뚫고서 뿌리를 내렸다. 나는 극락조의 살아 숨 쉬는 생명력에 울컥하고야 만다.


*


세상을 원망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비난을 쏟기보다, 가까운 이에게 그 원망을 돌릴 때가 있다. '나는 왜 부자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나에게는 왜 이런 교육의 기회가 없었을까?', '왜 나는 삶의 지침이 되어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 '나는 이렇게 상황이 안 좋은 걸까? 어떻게 극복하라고?' 답이 없는 원망 때문에 이내 가족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극락조를 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오롯이 품어주지도 않는 스티로폼 위에서, 메마른 흙 위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주어진 환경에서도 그 생명력을 포기하지 않고 되려 웅장하게 자라난 그네의 모습에 감동받고야 만다. 좁디좁은 화분 속, 심지어 그 속은 메마른 벌판보다 못한 스티로폼 위였지만, 스티로폼을 뚫고 끝까지 뿌리를 내리는 그 생동감에 감사하고야 만다.


죽고 싶다고 울부짖던 초등학생 2학년은 이제 31살이 되었다. 초등학생 2학년의 삶이나, 31살의 삶이나 '삶'은 여전히 어렵다. 고되고 또 힘겹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삶이란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내야만 하는 것, 살아내고야 마는 것, 그 '삶'을 오롯이 사는 자에게는 생명력이 보인다. 그 생명력은 극락조의 아름다움에서 보았듯, 분명 아름답고도 감동스러운 것이다. 내 삶 또한 아름답고 또한 감동이다. 내 삶을 기어코 사랑하고야 만다.







KakaoTalk_20220119_151244987_02.jpg
KakaoTalk_20220119_151244987_03.jpg




KakaoTalk_20220119_151244987_01.jpg


작가의 이전글28. 손님들이 내게 준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