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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Sep 21. 2023

'츄라이(try)'에 적당한 나이는 몇 살일까?

여섯 번째 직업, 화가

무언가 새로운 일을 도전하는데 적당한 나이는 몇 살일까? 대부분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들 하지만, 실제 도전을 앞두고는 주저하기 마련이다. 열정과 체력이 예전만 하지 않다고, 새로운 도전에는 돈이 든다고, 지금의 내 상황은 여의치 않다고 되뇐다.      


내게는 한평생 도망친 꿈이 하나 있다. 바로 '화가'라는 꿈이다. 수채화로 교내에서 숱하게 상을 받아왔고, 수묵담채화로 전국대회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상장들은 집에 벽지마냥 도배되었고, 나는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목표라고 여겼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어느 날, 엄마는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불러앉혔다. 그리고 주저하며 묵직한 말을 건넨다. "사랑하는 딸, 딸이 그림에 재능이 있는 건 분명해. 하지만 천재적인 능력은 아닌 것 같아" 엄마의 직설적인 말에 나는 그대로 예술고등학교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는 그림은 '취미'로만 여기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길 때 할 수 있는 취미, 딱 그 정도까지만. 그 뒤로 수능, 대학생활, 취업 준비 시기, 직장에서의 사회생활 등을 거치며 '그림'은 내 인생에서 옅어져 갔다.      


'그림'이란 그리움을 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쩍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졌다. 잠든 아이의 새근거림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라던가, 두텁고도 거칠한 아빠의 까만 손이라던가, 저마다의 주름을 내보이며 나를 향해 웃어주는 사람들의 얼굴이라던가, 그런 모든 그리움의 순간들을 캔버스 위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나는 그 꿈을 또 꾸깃꾸깃 접곤 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지금은 적합한 나이가 아니라는 말로.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에세이 쓰기 강연을 하게 되었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걸출한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조차도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해 보았다. 에세이라는 게 무엇일까,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있어야만 쓸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에세이란 우직하게 살아낸 삶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풀어낸 것이다. 그래서 에세이가 좋다. 그래서 에세이를 썼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에세이 수업을 통해 만난 이들은, 내게 되려 가르침을 주었다. 그들은 시도에 앞서 수많은 걱정거리에 밤을 지새워도, 다음날 이내 한발 앞으로 전진한다. 도전이 '성공'이라는 결과를 낳지 않아도, 늘 실패를 일삼더라도 행복해한다. 시작 이후 수많은 멈춤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내 또 다른 시작을 해낸다. 나이 50살에 환경미화원이 되어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이라는 틀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된다. '취준생이 취미를 가져도 되는 걸까?' 고민하다 스스로를 비겁자라고 말하며,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이로부터 용기를 배운다. 매일 실패를 알고 하는 도전에 임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전'이라는 정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도전이란 정면으로 맞서 내게 싸움을 거는 일이다. 무엇이 되든 못되든, 목표를 이루든 말든 상관없다. 결과지향적 도전이 아닌, 나를 어루만지는 도전을 한다. 그들의 글 덕분에 나는 지난날 도망친 꿈으로부터 직면을 선택했다. 꾸깃꾸깃 구겨진 꿈을 펼쳐내어 기어코 붓을 들었다. 


나는 화가다. 작품이 어디에 공개되지도, 판매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화가'다. 최근에는 유화를 만지기 시작했다. 유화가 주는 물성은 독특한 편인데, 기름을 섞어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기도 하고, 기름으로 붓을 세척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리고 나면 항상 특유의 물감냄새가 온 몸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그 냄새는 하루종일 내게 달라붙어있는데, 숨을 타고 올라오는 그 냄새를 통해 나는 꿈을 이뤘음을 확인한다. 꿈은 이토록이나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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