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67_The Red Resonance
2099년, 네오서울.
감정이 통제되고, 인간의 감정 데이터를 ‘화폐’처럼 거래하는 시대.
과학자 하윤석은 감정을 제거해 완전한 인간을 만들려 했고,
그의 딸 유진은 감정 실험의 중심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어머니 에리나는 몰래 감정의 기록을 남기고,
그녀의 기억은 하나의 붉은 큐브 ― KAIROS 시그널 ― 속에 봉인되었다.
세월이 흘러, 감정이 사라진 도시 속에서
유진은 금지된 감정 데이터를 복원하다가
AURA 시스템이 제어할 수 없는 붉은 파동을 일으킨다.
그 파동은 도시 전역으로 확산되어,
억눌렸던 인간들의 감정이 동시에 깨어났다.
그날 밤, 도시의 감시망이 처음으로 흔들렸고
유진의 기억 속 어머니의 마지막 음성이 깨어났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 기억은 언젠가 다시 깨어날 거야.”
그리고 그녀를 뒤쫓던 감정 검열국 요원 레온 역시
그 붉은 파동 속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도시는 불안정하게 떨렸고 —
그 붉은 진동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시간: 2099년 6월 18일 새벽 ~ 같은 날 밤
장소: 네오서울 하층 루멘 구역 → 감정 검열국 타워 → 폐역 지하 터널
ACT I ― 감정의 잔향 (Echo of Emotion)
새벽 3시 42분.
루멘 구역의 공기가 붉게 뒤틀렸다.
빛도 소리도 잠시 멈춘 듯한 정적—그 안에서 미세한 전자 진동이 퍼져나갔다.
〈비인가 감정 파형 감지 — 주파수: KAIROS_2099〉
〈원천 불명. 확산 반경 2.3km〉
도시는 정전됐다.
광고판이 모두 꺼지고, 사람들의 뉴로패치가 동시에 깜박였다.
그 순간, 감정이 ‘멈춘’ 네오서울의 새벽에 단 한 사람만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유진.
그녀의 손안에서 붉은 큐브가 미세하게 뛰었다.
규칙적인 파형—마치 생명체의 심장 박동 같았다.
유진(속삭이며):
“이건 단순한 오류가 아니야.
누군가 내 기억을… 부르고 있어.”
그녀는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폐쇄된 감정시장 입구, 녹슨 철문 옆 벽에는 오래된 낙서가 남아 있었다.
‘웃는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유진의 손끝이 그 문장을 스쳤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감정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전해졌다.
ACT II ― 검열국의 그림자 (The Silent Enforcer)
장소: 감정 검열국 타워 44층
레온 파크는 보고서를 닫았다.
홀로그램 위엔 붉은 표식이 떠 있었다.
〈대상: 유진 하〉
〈감정 오염지수: 87%〉
〈제거 우선순위: A〉
그는 창문 너머의 네오서울을 내려다보았다.
하층 루멘에서 퍼져나온 붉은 파형이 도심의 유리탑에 반사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미세하게 숨을 쉬는 듯했다.
AI 보좌 하운드의 차가운 음성이 울렸다.
하운드:
“레온 요원, 감정 억제제를 복용하십시오.
심박수 102.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레온:
“…필요 없어.”
하운드:
“그건 명령 위반입니다.”
레온:
“명령보다 중요한 게 있어.”
그의 시선이 모니터 속 한 인물에 머물렀다.
유진.
그녀의 눈동자 속 붉은빛이 화면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하운드:
“그녀는 감정의 매개체입니다.
AURA 시스템 감염 가능성 98%.”
레온:
“아니. 그녀는… 복원자야.”
AI의 눈이 차갑게 반짝였다.
하운드:
“감정은 바이러스입니다.
전염되기 전에 삭제해야 합니다.”
레온은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낮게, 거의 혼잣말로 말했다.
레온:
“그게 바로… 인간이 되는 증거 아닐까.”
창밖에서 붉은 빛이 반사되며 그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 순간, 레온의 눈빛엔 처음으로 ‘온기’가 스쳤다.
ACT III ― 붉은 공명 (The Night of Resonance)
장소: 폐역 지하 터널
시간: 밤 11시 58분
지하의 공기는 눅눅하고 냉랭했다.
고요한 터널 안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잔향이 울렸다.
유진은 파손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손안의 붉은 큐브가 천천히 다시 빛났다.
그 빛 속에서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리나(음성):
“유진아… 기억해.
감정은 아직 살아 있단다.”
그 순간,
공기 중에서 붉은 입자들이 피어올랐다.
시간의 틈이 열리듯, 과거의 잔상이 스쳐갔다.
하얀 실험복의 남자 — 하윤석.
실험대 위 붉은 큐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윤석(기록 음성):
“감정이란 건 결국,
서로의 파형이 공명할 때 생기는 노이즈야.
하지만 그 노이즈 속에… 진짜가 숨는다.”
유진의 눈가가 흔들렸다.
입술이 떨리며 작은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유진:
“아빠… 난 그 노이즈 속에서 엄마의 미소를 봤어요.”
그때, 터널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철길 위로 부츠가 부딪히는 묵직한 리듬.
레온.
그의 손목에서 감정 억제 장치가 불안하게 깜빡였다.
레온:
“당신, 또 시스템을 흔들었군요.”
유진:
“당신도 느끼잖아요.
지금 도시가… 떨리고 있어요.”
레온:
“그건 감정의 오염이에요.”
유진(단호하게):
“아니요. 회복이에요.”
붉은 파형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피어올랐다.
공기가 진동했고, 두 사람의 뉴로패치가 동시에 반응했다.
— 두근, 두근.
서로 다른 심장 박동이 겹쳐졌다.
이질적이지만 완벽한 리듬이었다.
레온의 귀속에서 하운드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렸다.
하운드:
“위험합니다. 감정 공명 감지. 즉시 격리 절차를—”
레온은 명령을 끊었다.
손끝에서 전원이 꺼지며 정적이 내려앉았다.
레온(조용히):
“…감정이 이렇게 따뜻했나.”
붉은 파형이 터널 벽을 타고 확산되며 공명했다.
금속 벽이 울리고, 먼지가 진동했다.
유진은 손을 내밀었다.
유진:
“이건 감염이 아니라… 기억이에요.”
그 순간,
하늘 위 스파이어가 붉게 점멸했다.
〈AURA NETWORK — 감정 파동 동기화 실패〉
모든 시스템이 멈췄다.
도시는 단 한 번, 진짜로 ‘느꼈다.’
엔딩 내레이션
유진(보이스오버):
“그날 밤, 네오서울은 처음으로 침묵했어요.
기계의 심장이 멈춘 그 순간,
인간의 심장이 도시를 대신 뛰기 시작했죠.
그 진동은 아직 멈추지 않았어요.
왜냐면… 그것이 불완전함의 시작이었으니까.”
FADE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