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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양이다.
누군가는 나를 ‘교수님’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쌤’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나를 소개하는 게 쉽지 않다.
그저 이런 사람이다.
남의 말 한 마디에 괜히 심장이 빨라지고,
사소한 눈빛 하나에도 괜히 의미를 찾아내고,
누군가의 칭찬이면 하늘로 날아오르고,
무심한 말이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조금 예민하고, 조금 욕심 많은, 그런 사람.
나는 늘
조금 더 예뻐 보이고 싶고,
조금 더 인정받고 싶고,
조금 더 사랑받고 싶었다.
그 욕망을 숨기려 할수록
이상하게 더 들키는 인생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은
뜻하지 않은 코미디와
뜻밖의 난관과
뜻밖의 감동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 이제 진짜로 내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앞으로 펼쳐질 내 교수 인생은
조금 어색하고,
조금 웃기고,
조금 눈물 나고,
아마도 아주 나답게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뭐, 괜찮다.
나는 박양이니까.
오늘도 조용히 속삭이며 문을 연다.
“Bonjour, my story.”
출근 첫날 아침,
나는 거울 앞에서 또 셔츠를 갈아입고 있었다.
파리지앵 느낌의 블라우스?
아니면 영상 촬영에도 어울리는 미니멀 룩?
고민만으로도 체력이 반쯤 빠져나갔다.
나는 박양이.
조금 예민하고, 조금 욕망이 크고,
조금 고양이 같고, 조금 허세 있고,
그리고…
좀 많이 사랑받고 싶은 여자.
오늘은 교수 인생의 첫 장면이니
완벽해야 했다.
“Bonjour, my new life—”
그 순간.
“박양이 교수님이시죠?”
뒤에서 묵직한 한국식 억양이 들렸다.
돌아보니, 이미 공기를 장악한 한 남자 교수.
한 학기 선배인 장견제 교수.
한국 토종 느낌 200%.
전형적 ‘우리 때는!’ 타입.
예상되는 전공: 국문학 or 산업경영.
별명: 장군 or 장피디.
그는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더니 말했다.
“출근 첫날인데… 너무 꾸미신 거 아니에요?
우리 학교는 실용주의라서 그런 화려한… 그… 프랑스풍?
굳이 필요 없어요.”
…
내 프랑스 감성이
첫날부터 ‘장벽’과 충돌했다.
그의 첫 마디는 이런 의미였다.
“우리 방식에 맞춰라.
너무 나대지 마라.”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 오늘 진짜 쉽지 않겠는데…”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내 예민 센서 5세대가 작동했다.
A 교수: 후—
B 교수: 눈 안 마주침
C 교수: 커피 두 번 젓고 멈춤
그리고 중앙에 앉은 장견제 교수는
회의 자료를 탁, 탁, 탁 넘기고 있었다.
“박 교수님, 프랑스어 전공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근데 이젠 영상콘텐츠도 한다고요?”
“아… 네. 교수법 개발을—”
“음. 요즘 다들 콘텐츠라는데…
부지런하면 되는 건데 뭘 그렇게 어렵게…”
내 마음 한쪽이 쿡 하고 찔렸다.
그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네 방식은 가볍다.
우리식 방식이 정통이다.”
나는 속으로 심장 진정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장견제 교수의 직설은 계속됐다.
“앞으로 회의에서는 딱 필요한 말만 하세요.
우리 학교는 실무형이라…”
드디어 내 예민 센서 풀가동.
[해석] = “겸손하게 굴어라. 튀지 마라.”
나는 그날 그냥 앉아 있었다.
그냥 앉아 있는데도
마치 ‘잘못된 프랑스 감성’으로 꾸짖음을 듣는 느낌이었다.
회의는 끝났지만
내 멘탈은 이미 반쯤 날아갔다.
점심시간.
나는 조용히 샌드위치를 뜯고 있었는데
복도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교수님! 프랑스어 발음 너무 좋아요!”
“쌤, 영상 수업 진짜 감동이에요!”
“선배들이 교수님 얘기 많이 하던데요?”
“인스타 릴스 강의 또 올려주세요!”
순식간에
학생들이 내 연구실 앞에 줄을 섰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래… 이게 나야!
이게 내가 꿈꿔온 교수의 삶!”
그런데—
복도 한쪽 끝에서
장견제 교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음… 인기?
그거 두고 보자.”
그 특유의 토종 근성은
새로운 걸 의심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본능은 지금
나에게 정조준되어 있었다.
회식 자리.
테이블의 헤드 테이블은
당연히 장견제 교수였다.
그는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박 교수.
프랑스어라… 외국 감성이라…
뭐 좋죠. 근데 그게 우리 학교에 얼마나 필요할까요?”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요즘 학생들은 글로벌 감성과 영상학습을 좋아하니까요…”
그때 장견제 교수가 벌떡.
“우리는 실무 중심이라니까요!
영상이고 뭐고, 결국 근성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테이블 공기 급냉.
나는 반사적으로
프랑스 감성과 크리에이터 본능을 동시에 켰다.
“아… 선배님. 사실 저요…
프랑스 감성에 미친 척하는 걸 좋아합니다.
학생들이 좋아하니까 콘텐츠처럼 활용하는 거죠.”
장견제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콘텐츠처럼?”
나는 최종기술을 썼다.
“네. 그냥 학생들이랑 소통 좀 해보려고요.
저도… 살아남아야죠. 하하하.”
순간
장견제 교수는 피식 웃었다.
“흠… 뭐. 솔직하네.
보긴 볼게요. 얼마나 가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 요약:
학생 인기: 폭발
동료 반응: 미지근
장견제 교수: 경계모드 돌입
내 예민함: 사상 최고치
나의 욕망: 계속 살아 있음
나의 불안: 더 커짐
앞으로의 전망: 시트콤 100%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 학교는
프랑스 감성과 토종 근성이
조용히 공존을 요구하는 장소였구나.”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박양이.
예민해도, 흔들려도,
결국 살아남는 여자니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All is well.
내일은 또 내일의 박양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