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이야기[4]
"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 대부분이 이렇게 터무니없네. … (중략) 미디어는 그것을 비정상이라고 말하며 이러저러한 제품을 사야 완벽한 가정이 될 수 있다고 암시를 걸지.
우리 주변에는 그런 암시들이 넘쳐나네. 처음엔 거짓이라는 걸 알지만, 자꾸 보다 보면 현실로 착각하게 되지. 그때부터 불안감이 엄습하는 거야.
왠지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사회에서 탈락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돈만 있으면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돈만 있다면 완벽해질 텐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고통당하지.
하지만 아무리 돈을 벌어도 완벽한 인생은 살 수가 없네. 완벽한 부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 (중략)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자질구레하고 짜증나는 일들이 사라지리라 생각하네. … (중략) 하지만 막상 부자가 되면 새로운 차원의 복잡한 일들이 벌어진다네. 돈이란 모을 때는 재밌지만 지켜야 할 순간이 오면 하나도 재미가 없네. 자네는 지켜야 하는 부담감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 (중략) 맘 편하게 발 뻗고 잘 수가 없지.
편하게 살고 싶어서 부자가 되려 한다? 이것처럼 허무 맹랑한 말도 없네. 일단 불편함을 견뎌야 돈을 벌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어.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면, 더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그만큼 관리할 것들이 많아지네.
물질로는 스트레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 (중략)
"자네, 지갑에 10만 원을 가지고 있으면 전 세계에서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 알고 있나? 만약 재산이 6,000만 원이 넘으면 성인 기준으로 세계 상위 10% 부자에 속한다는 것은 아나? 5억 원이 넘으면 세계 상위 1%의 부자가 되네."
"절대적인 수치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서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네. 물론 더 많이 가진 부자들도 깨닫지 못하지. 그들도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괴로워하네. 별장이 없어서 분통을 터뜨리고, 집값이 떨어졌다고 눈물을 흘리고, 요트가 없어서 자괴감에 빠지지."
"그래도 100달러가 없어서 괴로운 것보다는 요트가 없어서 괴로운 게 낫죠."
신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조이사가 지팡이 손잡이에 턱을 괸 채 고개를 저었다.
"남이 볼 때야 천지 차이지만 괴로움의 크기는 별반 다르지 않네. … (중략)"
"그러니까 건강, 돈, 권력 모두 부질없으니 저 같은 샐러리맨은 평생 가난하게 살다 죽으란 말씀인가요?"
조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뒤로 노을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면 오랫동안 체력을 기르고 산을 배워야 하네. 평생을 다 바쳐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지.
설령 성공 한들, 정상에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눈보라가 치기 전에 얼른 깃발을 꽂고 사진을 찍고 하산해야 하지.
에베레스트를 내려가는 산악인을 상상해보게.
그가 정상 탈환에만 인생의 목적을 두었다면 평생 한 시간밖에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거네.
실상 그의 일생의 긴 시간들은 산을 오르기 위한 과정이었지. 그 과정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면 그는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네."
"어떤 의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이사가 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펜을 꺼내 신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썼다.
"인생의 의미는 여기에 있네."
신은 자신의 손바닥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人間
"나무는 혼자 서 있어도 나무(木)고, 돌은 혼자 있어도 돌(石)이네. 하지만 인간(人)은 혼자서는 인간(人間)이 될 수 없네. 이것이 동양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네. 타인 없이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 관계가 인생이고 존재 이유인 것이네. 인생의 의미는 관계 속에 있어."
… (중략) 상처를 주었던 얼굴들이 기억의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신은 '人間'이라고 쓰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개똥 같은 인간들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들은 자네에게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완벽한 부모, 완벽한 배우자, 완벽한 직장상사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고맙게도 가르쳐준 것일세.
인간관계란 완벽하지 않은 게 당연해.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픈 부분이 있기 마련이야. 이것이 인생의 순리네. 아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네."
"절벽에서 떠밀려도 순순히 받아들이라고요?
"아무도 자네를 절벽에서 떠밀지 않아.
만약 누군가에게 상처받는다면… 그냥 똥을 밟았다고 생각하게.
똥을 밟았다고 주저앉으면 앞길에서 기다리는 기쁨을 얻지 못하네.
똥을 밟으면 신발을 씻으면 그만이야."
"상식적으로 질 수가 없는 게임이죠. 네 장의 에이스 카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조이사님이 배짱을 가지고 베팅을 한다면 백회장은 'die'를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 (중략) "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원더랜드는 무너졌을 거네. 오백 명이 넘는 직원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관련 업체들은 연쇄 부도를 당하고, 주주들은 휴지조각이 된 주식을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겠지."
"그들이 조이사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어찌됐든 조이사님은 큰 이익을 보게 됩니다. 승리자가 되는 거라고요!"
신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게임의 속성이라네. 겉보기엔 이겼지만 결국은 지는 것이지."
"왜 진다는 겁니까?"
"사람들을 잃으니까."
신은 가슴을 치다가 아예 발을 굴렀다.
"대체 남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좋을 때는 아이를 품에 안지만 불구덩이 방 안에서는 아이를 깔고 앉는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친구를 배신하고, 형제를 배신하고, 조카의 재산을 빼앗아 가는 족속들을 왜 챙겨줘야 합니까? 욕 좀 얻어먹는 게 그렇게 싫으신 겁니까?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데요?"
"아마 오탁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네."
신은 할 말을 잃었다.
※ 오탁은 신이 타 부서에서 스카웃한 인물, 오탁의 산업스파이 행위로 신의 팀과 기업은 위기에 봉착한다.
자네는 인생을 게임이라고 말했지.
하지만 인생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네.
인생의 유일한 승리자는 오직 행복한 사람이라네.
앞으로도 자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테지만 그 아픔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네.
아팠던 사람만이 큰 사랑을 줄 수 있다네.
행복은 관계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주길 바라네.
부디 이웃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연민을 갖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네.
:: 레이먼드 조 저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관계의 힘』 中
흥미롭게도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은 「신」이다.
정확히는 성씨가 신으로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인간 불신이 깊은 주인공 '신'에 대해선 '(자)신을 모르는 신'이라는, 즉, 지극히 인간답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을 십 년 전에 읽었다면 지금과는 매우 다른 감상을 느꼈을 것 같다.
과거의 나는 주는 행위의 참된 가치와 '나를 절벽에서 떠미는 이는 없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책은 기증했다.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