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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May 16. 2021

진지한 막내, 장난꾸러기 막내

풀타임 교사가 된 지도 어언 3개월이 되어간다. 내가 지내는 교무실은 총 7명이 사용하는 아담한 사이즈인데, 거기에서 나는 생일로 1개월 밀리긴 했지만 아무튼 한국 나이로는 가장 어리고, 사회생활을 늦게 시작한 덕에 아직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남아있는 터라 사람들이 좀 어리게 봐줘서 막내 라인에 들게 되었다.


흔히 막내라고 하면 싹싹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거나, 밝고 명랑하고 쾌활하여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나는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한테 잘 먹히는 범용 개그에는 소질이 없으며, 대인관계 센스는 누가 하는 것을 보고 외워서 쓰는 사람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쭉 공부만 해 온 터라 학습된 센스마저 바닥상태이고, 홀로 생각할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즉, 싹싹하지도 않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하는데 일은 잘 몰라서 허우적대는 막내인 것이다.


슬프게도 내 옆자리에는 나보다 1개월 먼저 태어나고 친화력이 좋으며 세대를 초월하는 범용 개그에 능숙한 찐 막내가 있다. 코로나로 어렵사리 마련한 4인 회식 자리에서 때마침 이 찐 막내 선생님의 취미와 부장님의 취미가 야구로 같아서 회식자리는 더욱 화기애애해졌었다. 나는 프로야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들의 말을 눈을 맞추고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멘트가 날아왔다.


"찬우 샘은 뭐 좋아해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미드 이야기,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를 꺼냈는데, 프로야구 응원가를 부르며 한창 올라갔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내 앞에 앉으셨던 부장님은 피곤하셨는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뻗으셨고 그의 발에 앞자리에 있던 내 다리가 닿아서 나는 얼른 다리를 접었다, 말없이. 나중에 보니 대각선에 앉아있는 찐 막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발이 부딪치자 "아 선생님, 선생님 때문에 저 도가니 보험 들어야겠어요~!"라며 맞받아치는 것이 아닌가. 모두의 웃음. 혹시나 상대방이 미안해할까 봐 말을 아꼈는데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었나 싶어 더 불편해졌다.


찐 막내 덕분에 교무실에 웃음이 이는 일이 이후로도 자주 있었다. 일도 물어물어 배우는 중인 막내라면 분위기라도 띄워야 하는데 싶기도 하고, 실제로 부장님이 찐 막내를 더 편하게 생각하시면서 그의 센스를 빌려 자율학습 프로그램의 이름을 지어야겠다며 말을 건네기도 하는 모습에 혼자서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으레 기대하던 것처럼 선 잘 지키는 장난꾸러기가 막내로 있어서 즐거워했다. 나의 위치는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더러 '매사에 진지해서 뭔 말을 못 하겠다'라고 농담을 던지는 찐 막내의 말을 곱씹다 보니 내가 정말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나 싶어 걱정스러웠다. 집단에서 나는 무색무취에 재미없는 사람, 있으나 없으나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3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귀여운 장난꾸러기 막내는 아니다. 여전히 프로야구 이야기에서 청자이고, 개그는 커녕 내가 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진득하게 잘 들어주고, 잘 기억해주고, 적당히 반응하며,  한번 배운 일은 실수 없이 하려고 노력하는 무색무취무해가 정체성인 사람으로 지내고 있다. 스스로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거나 유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내게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덜어냈다. 부담감을 덜어내는 데에는 아래 두 가지 생각이 도움이 됐다.


사람들은 이미 나를 편하게 생각한다. 나는 나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어린 데다 경력도 짧고 권력도 딱히 없고 숨기는 개인사도 없다. 따라서 내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묻고 싶은 걸 묻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인 관계에서 튀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가진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내 성향에 맞는 포지션으로 자리매김하고 나머지 에너지를 일을 배우는 데 써서 업무에서 강점을 드러내면 그게 곧 집단에서 나의 정체성이 될 것이다.


장난꾸러기 막내로 어화둥둥 관심과 사랑을 받을 마음을 내려놓으니 직장 생활이 훨씬 만족스럽다. 범용 개그에는 소질이 없으나 내 유머에 대한 소수의 마니아층이 생겼고, 업무에 익숙해지며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오랜 시간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도 내가 다가가기 편한 주제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되었다.


글을 통해 내향적이고 진지하며 정적인 취미를 가진 나 같은 사회초년생들에게 싹싹하고 귀여운 장난꾸러기가 아니어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나의 메시지가 누군가의 불안을 잠재우고 단잠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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