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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죽기로 한 날(1)

by 오후의 책방

난 죽기로 했어요.

아버지 앞에선 침을 삼키다가도 사레 걸리는 내가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문제는 죽는 방법이었어요. 가출할까도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얼마 못 가 잡히고 말 거에요. 그럼 또 엄청 두들겨 맞겠죠. 어쩌면 엄마에게 화풀이할지도 몰라요. 그건 정말 최악이에요. 내가 진짜 바라는 건 아버지가 달라지는 거니까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요?


마을 어귀에 당수나무라 부르는 커다란 왕버드나무가 있어요. 대보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하는 곳이죠. 우린 꼬꾸랑할매 나무라고 불러요. 네댓 명이 대자로 맞잡고 둘러야 하는 커다란 둥치가 이러엏게 할매 등처럼 꼬꾸라져, 쉽게 올라탈 수 있었거든요. 우린 두 팔을 벌린 듯 품 넓은 가지를 타고 놀았어요. 오른쪽 가지는 마을 입구 쪽으로 손을 뻗어 있어요. 그 외길을 따라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읍내 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큰 다리가 하나 나와요. 그 아래로 내려가 강을 거슬러 또 15분 정도 올라가면 큰 보가 있어요. 정확히 15분인지는 몰라요. 15분 정도만 참으면 힘든 일은 다 지나가더라고요. 무슨 일이든요. 어른들은 거긴 물귀신이 산다고 절대 가지 말라 했어요.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할 때쯤엔 이미 얘들은 거반 다 해본 뒤인 경우가 많잖아요.

아버지도 절대 가지 말라고 했어요. 난 거기가 어딘지 모른 척했어요. 아버지가 이토록 성내는 이유가 있어요.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거든요. 동네 여자애가 오빠랑 멱감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어요. 오빠도 한동안 보이지 않았어요. 혹시나 볼까, 문 앞을 기웃거린 적이 있어요. 아줌마가 문턱에 앉아 있었는데, 말을 붙일 수 없었어요. 뭐랄까,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할 사람 같았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리고 사실, 물에 빠져 죽는 건 끔찍한 일인 것 같아요. 숨 참는 연습을 해봤지만, 그건 아무리 해도 15분을 견딜 수 없었어요. 1분만 지나도 눈이 빠질 것 같고, 가슴은 쭈그러들어, 급히 숨을 들이쉬었어요. 이건 연습한다고 더 늘어날 건 아니었어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냐고요? 밤이었어요. 정확한 날은 모르겠어요.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당장 일어나, 니는 형 방에 가!”

막 잠이 들려던 때,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에 놀라 깼어요. 이불도 챙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나왔어요. 난 이런 날이 가장 무서워요. 폭풍 치는 날, 천둥소리보다 더 움츠러들고 두려워요. 방을 건너가며 생각해요. 홀로 남겨진 엄마가 웅크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모습을. 그리고는 쿵, 벽을 울리며 울부짖는 소리, 그만하라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귀를 막아도 바닥에 닿은 등으로 들려오는 소리. 방과 방 사이 텅 빈 공기를 울리며 넘어오는 소리는 밤이었기에 누구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등을 울리는 소리가 무서워 엎드리면 형은 내 손을 잡았어요. 그러고는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며 뚝뚝 끊어 씹듯 말했어요.

“내가 죽일끼다. 내가 꼭.”

쿵, 천둥이 치고, 악, 등이 울리고, 쨍그랑, 폭풍이 공기를 찢고, 창도 벽도 바닥도 슬픔으로, 공포로 울다가 조금씩 지친 듯 잦아들면, 귀를 꽉 막은 손도 지친 듯 스르륵, 15분쯤 어쩌면 몇 시간일지 모를 15분쯤이면 모든 소리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요.


아침이면 엄마가 방과 방 사이에 텅 비었던 부엌을 가득 채워 놓아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대는 소리, 토닥토닥 도마와 칼이 서로를 다독이는 소리, 달큰한 쌀밥이 익는 소리로요.

“야들아, 밥 무라. 완아, 아부지도 진지 드시라 해라.”

밤의 소리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나도 엄마도요. 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는 엄마의 팔을 자꾸 끌어당기며, 얼굴을 들이밀어요. “엄마, 엄마아. 히, 이히.” 그러면 엄마는 옥수숫대가 푹 꺾이듯 나를 안으며 “그래그래, 오냐.”하고 말해요. 엄마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울고 있는 게 분명해요. 맞닿은 가슴이 물결처럼 일렁이거든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혹시 내가 죽으면 아버지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게.


“너 이 새끼, 날 바보라고 생각하지? 까불면 가만히 안 둔데이.”

이렇게 욕을 해대도 영이는 종종 나랑 같이 노는 친구예요. 내가 반말하면 신경질을 내지만, 덩치만 컸지 어른 같지 않았어요. 영이 할머니는 영이가 시집갈 나이라고 해요. 하지만 시집을 갈 수 있을지 걱정이래요. 영이가 아주 어렸을 적에 할미가 영이를 정미소에 데리고 갔었데요. 마을 어귀 삼거리는 시내로 가는 한 길, 동네로 들어오는 한 길 그리고 또 한 길은 공사를 하느라 트럭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어요. 소풍날 가보았던 대학교를 그때 한창 짓고 있는 중이었데요. 그 너머엔 군부대가 있는데, 공사 트럭에 군부대 육공트럭까지 1차선 외길 도로를 먼지 날리며 다녔데요. 하필 정미소가 도롯가에 있었고, 하필 그날은 정미소 아저씨와 영이 할머니가 말다툼하고 있었데요. 하필 그때 공사장 트럭이, 하필 어리고 작은 영이를 못 본 거에요.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데요.


맞아요. 난 죽기로 했었죠. 아버지 이발관에 가려면 도로를 건너야 했어요. 아버진 차 다니는 길을 혼자 왔다며 화냈지만, 문 앞에서 쭈뼛대고 있으면 꼭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여줬어요. 100원이면 쭈쭈바를 하나 먹고도 50원이 남았어요. 트럭도 무섭고 아버지도 무섭지만, 매일 도로를 건넜어요. 저녁놀이 질 때쯤엔 육공트럭이 몇 대씩 연달아 지나가요. 하루는 큰맘 먹고, 도롯가에서 트럭을 기다렸어요. 조금씩 어둑해질 때쯤, 마침 육공트럭 세 대가 줄지어 달려왔어요. 난 검은 아스팔트에서 딱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 섰어요. 맨 앞차가 번쩍번쩍 눈을 껌뻑였어요. 노을을 등진 트럭 그림자가 코끼리 코처럼 기다랗게 뻗어 있었어요. 코끼리가 저만큼 클까, 탱크가 저만큼 클까? 생각하는 사이, 굉음 소리가 갑자기, 갑작스럽게 커졌어요. 어느새 트럭이 앞에 와 있었어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빠앙!’ 트럭이 고함쳤어요.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야, 이노무 새끼야. 니 지금 뭐하고 있노.”

누가 뒷덜미를 휙, 낚아챘어요. 용식이 아제가 저를 발견한 거였어요.

“니 뒤질라 카나? 이 미친 놈의 새끼야. 아부지 알면 난리난데이. 너그 아부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나?”

아제는 아버지에게 이발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어요. 비밀로 할 테니 다시는 도롯가에 서 있지 말라고 했어요. 비밀은 무슨, 어차피 아버진 다 알게 될 거예요. 어른들은 술을 먹고 말하든, 싸우다가 말하든, 불리하다 싶으면 살을 에는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쏟아내요. 그리곤 원수처럼 지내요. 그것도 한순간에 벌어지는 일이에요. 어쨌든 이제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어요. 아버지가 알기 전에 일을 치러야 해요. 편지만 쓰면 모든 준비는 마치는 거예요.

‘이젠 술도 그만 마시고, 엄마도 그만 때리고….’

용식이 아제가 지나가지 않는 날, 노을 질 시간에, 이발관 우편함에 몰래 넣어 놓을 거예요.



이번 추석에도 아버진 한사코 제사를 지내지 않았어요. 엄마는 날 있게 해준 뿌리라고, 조상 제사는 거르면 안 된다며 꼬박꼬박 제사상을 차려요. 아버진 아침이면 사라졌다가 제사를 마칠 때쯤에 돌아와요. 처음엔 당숙부들께 음복술을 권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아버지가 남은 술을 다 먹어요.

“보이소, 행님. 조카들이 삼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어딨는교, 앞으로는 행님이 제대로 제사 지내소.”

“너그는 모르는 이유가 다 있다, 모르면 가만 있그라.”

친척들이 돌아간 뒤에도, 아버진 술잔을 놓지 않아요.

“저그들이 뭘 안다고 내보고 이래라 저래라고, 어이 술 가져온나.”

“완이 아부지, 그만 드이소. 이러다가 지난번처럼 병원에 실려 갑니데이.”

“가져오라면 가져오지 어디 서방한테, 니도 내 무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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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기획제작자/서평가/ Youtube <오후의 책방> 크리에이터/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은퇴하면 작은 책방을 꾸려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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