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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 고양이의 선물

오늘

by 묘언

15세의 고양이, 보리가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다다 뛰어다니는 육중한 발소리,

왼팔을 쭉 내민 (매우 튼실하고 꽉 찬 거대한) 식빵 자세,

자기 밥그릇에 놓인 간밤의 사냥 전리품(대개는 끈이나 줄),

캣타워 꼭대기에 뛰어오른 직후의 기고만장한 표정,

낚싯대 장난감을 따라 펄쩍펄쩍 뛰는 발소리와 꺄항>.< 하는 신난 표정,

종이봉투 속에서의 요란한 (파바바박 시끄럽고, 보리는 제 머리만 숨기면 다 숨은 줄 알고, 봉투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술래잡기,

축구 드리블하듯 앞발로 하는 공놀이,

빗질해 줄 땐 버둥버둥 장난치는 몸짓,

시끌벅적 개구쟁이 표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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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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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보리는 이제 그 대신 다른 소리들과 모습들로 집 안 공기를 채워낸다.

(어릴 땐 없었던) 잠잘 때 코 고는 소리(꼭 인간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를 데시벨만 줄여놓은 것 같은),

바구니 속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장난감들과,

낚싯대 장난감을 흔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심드렁한 표정,

더 이상 오르지 않아 방 한구석의 외딴 전봇대 신세가 되어버린 캣타워,

빗질해 줄 때 눈을 지그시 감고 시원해하는 (안마받는 어르신 같은)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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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노령 고양이와의 일상은 고요와 안온함 그 자체다.

장난을 쳐봤자 누운 자리에서 꼼지락꼼지락,

하루의 대부분은 새근새근 잠을 자는 게 주된 일과이지만,

내가 뭔가를 집중해서 하고 있을 때 문득 인기척(묘기척?)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면

두 앞발을 모으고 앉아 마알간 눈망울로 나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을 때도 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거야? 오구오구 울 고양이.

괜히 미안해 꼭 안아주고 폭풍뽀뽀를 해주면,

내 품에 촉촉한 코를 폭 박고는 '와앙, 꺄흥, 먀앙, 쀼앩' 같은,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아깽이 목소리로 응석을 부린다.

그러면 내 심장은 데운 마시멜로처럼 달게 녹아내리고

내 뇌에선 옥시토신이 퐁퐁퐁 샘솟는 소리가 들리고

내 입에선 꾸꾸까까뾰잉뾰잉 혀가 반토막 난 방언이 터진다.


밥을 안 먹지 않고, 맛동산 모양의 정상적인 응가도 보았다면,

설사도 구토도 없었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하루.



삶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없을까?'에서 '그냥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로

모드가 바뀌는 시기가 있다.

심장은 그냥 정박으로 뛰었으면 좋겠고, 행운이나 대박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라고, 건드리지 말라고, 잔잔한 물에 조약돌도 던지지 말아 달라고

공지문을 크게 띄우고 살고 싶은 시기.

그런 시기를 사는 인간에게,

많이 아프지는 않은 노령의 반려고양이만큼 최고의 벗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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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가을날의 늦은 오후, 해가 지기 전 그림자가 기름해지고 햇살은 아직 황금빛으로 빛나,

사방은 고요하고 호수 위 물비늘은 반짝일 때,

차고 시커먼 어둠 따윈 절대 올 리 없을 것만 같은 짧고 찬란한 단 몇 시간 같은,

어쩌면 내 삶에 마지막으로 허락된, 분에 넘치도록 행복스러운,

나이 든 고양이로부터 매일 받는, 오늘이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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