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고,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여 있는 강력한 정신,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는 짐을 가득 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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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오만에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
자신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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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승리를 위해 정신은 이 거대한 용(최후의 신)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 신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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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모든 비극적 유희와 비극적 엄숙함을 비웃는다.
용기를 가지라, 개의치 마라, 조롱하라, 난폭하게 행동하라.
지혜는 우리들이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지혜는 여인이다. 따라서 언제나 전사만을 사랑한다.
그대들이 내게 말한다, "삶은 감당키 어렵다."라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 긍지를 가졌다가 저녁에는 체념하는가?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약간의 망상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망상 속에도 언제나 약간의 이성이 들어있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내게도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쾌하고 단순하고 우아하고 활동적인 작은 영혼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눈물을 흘리고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신을 믿게 된다면 그 신은 다만 춤출 줄 아는 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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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나무와 같은 존재 아닌가? 인간은 높은 곳으로 그리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 뿌리는 더욱더 강인하게 땅 속으로 파고들어 가려 한다네 아래 쪽으로, 어둠 속으로, 심연 속으로, 악 속으로 뻗어나가려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