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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un 27. 2024

빚 때문이라면, 빚을 모른다면

- 죽기 전에 두드려보세요.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 하느냐?"


미야베 미유키, 이영미 옮김, 문학동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로 더 유명한 <화차>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로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 이제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두 배우, 김민희와 고 이선균 배우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안 보신 분들이라면 보시기를 추천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청춘스타라 생각했던 김민희 배우를 다시 본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되도록 책으로 접하기를 바랍니다.

영화에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작가의 진심이 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화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어른인 독자로서, 그리고 같은 작가의 심정으로 미미여사(미야베 미유키의 팬들이 지어준 애칭)가 사회와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을 것 같은 말은 오직 책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조구치 변호사를 통해서 말이죠.

이 사람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며 소설의 플롯에서도 굳이 필요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 한 사람입니다.

너무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진짜 이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미조구치 변호사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사회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
(...)
국가 예산 규모의 산업을 엄중하게 감시 감독해야 마땅할 두 관청이
둘로 나뉘어 있고 소통도 매번 잘 안 됩니다.
그렇다보니 빈틈없고 발 빠른 대응을 할 수 없는 겁니다.
현실에서는 하나의 은행이 신용판매도 하고 현금서비스도 하는데 말입니다.
한 장의 카드로 다.

                                                             - 위의 책, 160-161pp

<화차>, 변영주 감독, 영화 스틸 사진


국가의 법이 흔들려 범죄와 가해자에 대한 벌이 합당하지 않다보니, 죄인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비례하여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픽션 작품에서도 가해자에게 '서사'를 만들어주는 것에 마땅치 않아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화차>는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주요 인물, 신조 교코와 세키네 쇼코는 이 사회에서 모범 시민으로 살아가는 인물은 아닐 뿐더러, 둘 중 하나는 범죄자이니까요.

영화를 보면 그 서사가 더욱 강렬하여 관객은 범죄자인 선영(김민희 분)을 처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작가는 소위 '사회파'라고 불리는 작가니까요.

저는 대부분의 소설이 '사회파'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쨌든 범죄물을 잘 쓰는 미미여사의 작품에서 진짜 범인은 '사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잘 새겨야 한다고 생각하죠.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인간애를 억지로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죄가 밉다면 눈앞의 인간 뒤에 진짜 죄인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보라."

이렇게 새긴다면 인간애를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필요 없이 죄를 똑바로 대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두 여인 중 한 여인에 대해  저는 독자로서 미조구치 변호사보다 엄격했습니다.

카드를 쓰다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한 여인의 서사였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개인의 책임에 대해서는 엄격한 편이고, 영화에서 '선영'의 서사가 소설 속 한 여인의 서사만을 약간 가져온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배경이 1990년대 초 일본인 이 소설에도 그러한 사회 풍조가 보입니다.


" .. 일부 매스컴에서 '빚을 맘껏 떼어먹는 개인파산'이니 '무책임 풍조를 조장하는 도피식 파산'이니 하며 요란하게 공격하는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겠죠."

                                                             - 같은 책 166p



하지만 미조구치 변호사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우리도 이미 한 차례 경험했지만, 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하면서 그때 무분별하게 발행된 카드가 개인을 불쏘시개로 만들었다는 것이 미조구치 변호사의 생각이고, 사회에 그 책임을 묻는 이유는 이미 위에 인용한 것처럼 어떤 교육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수능이 끝난 고3 학생들에게 미용 수업을 하는 경우가 있죠.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을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꿈보다 현실, 사치 보다 생존이 먼저라면, 미조구치 변호사의 말처럼 돈에 대한 강의가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요? 특히 '빚'의 무서움에 대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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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가 구태여 두 여인 중 한 여인의 빚을 개인 으로 만든 것은 바로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실제 현실에서 몰리고 있을,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말 없다고 비난받을 빚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죽지 말고 살 방법을 찾'으라는 작가의 깊은 한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난 말이죠, 강의 같은 데서 '어쨌거나 야반도주를 하기 전에, 죽기 전에, 사람을 죽이기 전에 파산이라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 위의 책, 169p


미조구치 변호사의 말을 저도 전하고 싶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죽기 전에, 혹은 죽이기 전에... 마지막 방법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냐고, 90년대 일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곳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http://www.minsaeng.org/

저도 보도를 통해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실 속 미조구치 변호사 같은 존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힘들게 활동을 해온 송태경 사무처장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분들은 꼭 이곳을 기억하시기를...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분들은 이곳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곳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 위의 책, 170p


저는 이 책을 19살, 사회에 나가기 직전의 청소년과 20대들, 그리고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은 꼭 구매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이 책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돈이 들지 않는 공공 도서관에 가서 꼭 빌려 읽기를 바랍니다.



위의 책, 5p

 


"...유달리 낭비벽이 심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어요.
그녀 신상에 일어난 일은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나나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 위의 책, 171p


딱히 사치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 흔한 명품백 하나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빚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빚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죠.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은 금융사회라 일컬어지는 이 사회에서 언제든 화차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죄를 짓고 화차에 태워지는 것이 불법추심에 말라죽는 것보다 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죠.

누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실패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무엇 하나 삐끗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충'도 알지 못한 채, 화려한 벽지 같은 금융사회에 발을 내딛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읽을거리가 아니라, 교과서로서 말이죠.

사와키 슈우시의 "백괴도권" 의 화차,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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