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원서를 읽는 사람들-Ever Read 1
원서를 읽으면 같은 책이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수원 일월도서관에는 ‘EverRead’라는 영어 원서 모임이 있다. 이름에는 조금 과장된 낭만이 담겨 있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영어 원서를 읽자.” 그 마음 하나로 열정적으로 밀어붙인 이름이다.
이 모임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영어 교육 정보를 나누기 위해 모였던 부모들의 모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아이들은 자랐고, 어느 순간 남은 것은 부모들의 영어 공부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어 원서를 함께 읽는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여러 멤버들이 오가며 몇 번의 흔들림도 있었지만 지금은 꽤 단단한 ‘정예 멤버’들이 남았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무엇보다 책 읽기를 즐기고 영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도서관에 모여 원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생각보다 즐겁다. 영어 공부라는 명분으로 모였지만 사실은 서로의 경험과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더 크다.
이번 달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은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Where the Crawdads Sing’이다. 이 작품은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 온 생태학자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로,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의 해안 습지를 배경으로 한다. 마을 청년 체이스 앤드루스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과 습지에서 홀로 자라난 소녀 카야 클라크의 성장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작품이다.
나는 이미 번역본으로 이 책을 읽었기에 원서를 읽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예상과 달랐다. ‘magnolia mouth’ 같은 미국 남부 특유의 표현, 그리고 marsh, lagoon, tide, estuary처럼 습지 생태계를 설명하는 단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미 읽었기에 이야기의 큰 줄기는 따라갈 수 있지만 낯선 단어와 표현을 만날 때마다 순간 생각이 멈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읽는다는 것은 종종 이런 식으로 독서를 더디게 만든다.
하지만 그 느린 속도 덕분에 생기는 재미도 있다. 사실 번역본으로 읽을 때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더 집중했다. 그런데 원서를 더듬거리며 읽기 시작하자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그러자 사건보다 습지의 바람과 물결, 야생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소녀 카야가 더 깊이 다가왔다. 어쩌면 영어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서 읽기가 자연스럽게 ‘slow reading’으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함께 붙잡고 의미를 살피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를 천천히 음미하게 된다.
오늘 모임에서도 흥미로운 표현들이 여럿 나왔다. 예를 들어 give someone a wide berth라는 표현이 있었다. 원래는 배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넓은 항로를 잡는 것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피하거나 거리를 두라는 의미로 쓰인다. 설명을 듣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인생에서도 가끔은 이런 표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에게도 상황에게도 넓은 항로를 두는 일 말이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표현은 keep one's underbelly less exposed였다. 이는 ‘취약한 부분(약점)을 덜 드러내다’라는 의미이다. 동물의 배처럼 가장 부드럽고 약한 부분을 뜻하는 ‘underbelly’를 이용해 자신의 치부나 전략적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는 모습을 비유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보고 있으면 야생을 오래 관찰해 온 생태학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져 흥미롭다. 이렇게 궁금한 표현 하나를 붙잡고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영어 공부라기보다 작은 문화 수업을 듣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오늘 읽은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따로 있었다. 카야와 테이트가 함께 가을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Autumn leaves don’t fall: they fly.
(낙엽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른다.)
문장을 읽는 순간 잠시 마음이 멈췄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떠오르고, 두 사람의 감정도 아주 조금 움직이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쩌면 원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단어 하나를 붙잡고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책 속 풍경 속에 서 있게 되는 순간 말이다. 오늘은 이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어쩌면 원서를 읽는 이유가 꼭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일 모임 정보 )
*3월 책: Where the Crawdads Sing (ch16-ch19)
*일시: 2026년 3월 5일(목) 10시 30분 ~ 12시 30분
*장소: 일월 도서관
*참여 인원: 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