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시민활동가로서 나에게로

홍천행복공장 빈터_내안의감옥

by 이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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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고 하면 대부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캐리어, 길게 뻗은 도로, 새로운 풍경과 낯선 사람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달랐다. 짐은 가벼웠고, 길은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다.
도착한 곳은 이름부터 생소한 “내 안의 감옥”. 화려한 명소나 바쁜 일정 대신,
책 한 권과 나만의 독방에서 시작된 북캠프는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찾아가는 조용한 모험이었다.


조용한 홍천, 느린 시간 속에서

강원도 홍천의 한적한 가을 풍경 속에서 열린 플라톤 아카데미 북캠프는
일상의 바쁜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책과 자신을 되돌아보는 특별한 기회를 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여 명의 참가자들이 강원도식 소박한 식단으로 점심을 함께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행복공장의 마스코트 해피, 토리와 함께 강가 산책을 즐겼다.
늦가을의 맑고 청명한 하늘은 캠프의 시작을 환영하듯 눈부셨고,
우리는 일상의 짐을 내려놓은 채 이 특별한 순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들고 온 책을 완독한 후, 우연히 마주한 권용석님의 유고집 『꽃지기 전에』를 구입했다.
그의 생각과 정서를 공유하고 싶었다.


내안의 감옥, 나만의 방, 나만의 시간


유고집을 손에 들고 들어선 306호실, 올려 둔 보일러가 방을 금세 데웠고,
온돌 위에 누웠을 때 차가운 공기와 달리 따뜻한 기운이 피부 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미니 화장실, 세면대, 요가 매트, 작은 테이블이 준비된 방에서 나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황차잎이 뜨거운 물 속에서 우러나는 동안, 하루 3분 나를 위한 숨고르기 시간.
미색 다기잔에 반사된 창밖 하늘은 코발트 블루로 빛났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캠프의 권장 도서였던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일상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독방에서 5시간여 몰입해 읽은 후, 나는 올해 자신을 성찰하고 다음을 준비해 보는 미션으로 편지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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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이 모여 세상을 밝히다


홍천의 차가운 밤공기 아래,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비밀스러운 일기를 낭독하며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였다.

누군가는 정성스레 손글씨를 적어왔고, 누군가는 즉석에서 한 해를 돌아보았다.

모닥불은 모든 비밀을 간직한 채 활활 타올랐다.


이어서 책토론이 이어졌다.

빌 펄롱과 세라, 막델레나 세탁소의 작은 굴곡들은
내 마음을 멈칫하게 했고, 사소한 행동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와 올려다본 하늘..쏟아질 듯한 별들 하나하나에 빌 펄롱, 아이린, 수녀원장,.. 책 속 캐릭터 들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밤하늘 별들을 보며 문득 몇 년 전 공정여행으로 공정무역 생산자인 필리핀 파나이 섬의 사탕수수 농장을 방문했던 때가 떠올랐다. 정전이 일상인 외딴 섬. 건물안은 정전으로 한치 앞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밖으로 나가니 밤하늘 별들이 가로등이고 이정표였다. 세상에 태어나 그토록 육안으로 많은 별들을 마주한 첫 경험이었다.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설렘과 환희를 느꼈다. 툇마루에 누워서 우리는 하염없이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그곳의 농부들이, 이 아이들이 이 터전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도했다.

그 순간, 나는 협동조합 활동가로서의 사명감을 깊이 느꼈고, 그것이 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 경험은 나에게 작은 변화의 중요성과 사명감의 본질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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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활동가, 나의 정체성


지난 10여 년, 나는 시민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시민활동가일까?
그냥 자원봉사를 오래 한 사람일 뿐일까?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으면 길게 설명하게 된다.
단체 이름, 프로젝트, 캠페인, 회의, 보고서까지.
그 순간, 나는 나 자신보다 사회적 역할을 먼저 떠올린다.
사회적 통념 속에서 시민활동가라는 단어는 여전히 생소하고,
자원봉사와 시민운동의 경계는 흐릿하다.

시민운동은 결국 시민이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참여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내세워 변화를 만들어간다.
그 ‘적극적 개입’이 바로 시민활동가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Civic Activist, 시민활동가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다.

즉, 단순한 자원봉사나 선행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공동체에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발견하며, 스스로 참여하여 변화를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나는 나를 시민활동가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내 삶의 열정과 시간이 스며든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책을 고민하고, 지역사회를 관찰하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적 변화를 향하도록 힘을 보태는 순간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시민활동가라는 정체성을 통해,
나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작은 선택과 사소한 실천, 나를 위한 성찰이 모여
사회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되고, 그 안에서 나는 나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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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실천과 연결

캠프의 몰입 독서와 성찰을 마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경험은 단순한 여행의 기억이 아니다.
독방에서의 조용한 시간, 모닥불 앞의 나눔, 밤하늘 별빛 속 성찰—
모든 것이 시민활동가로서 나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작은 선택과 사소한 일들이 모여 사회 변화의 토양이 되고,
한 사람의 행동, 작은 변화가 결국 더 큰 변화를 만든다.
내 안의 감옥, 1.5평 독방에서 마주한 나의 세계는,
이처럼 사소한 일들의 힘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맛본 강원도 감자떡, 단순하지만 따뜻한 이 경험이
내게 말해주었다.
여행이란, 한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마음을 반짝이게 하며,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열정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시민활동가다.
지난 시간의 열정과 선택이 만든 나의 증거,
작은 행동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나의 삶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