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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려면 메타인지력이 필요하다

by 율마

우리는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불편함을 경험한다. 스트레스 받는 사건에 둘러싸여 있고, 영 껄끄러운 관계도 있다. 누가 봐도 불편할만한 상황이 있는가하면, 나에게만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미묘한 지점도 있다. 이럴 때 우리 뇌는 적당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 정신분석 용어로는 '방어기제'에 포함되기도 하고, 요즘 시쳇말로 정신승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상황을 이해하고 납득할만한 썰을 찾고 생성해낸다. 이 썰이 있기에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켰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결국 인간이 거짓말을 할 수 있어서(가짜 썰을 만들고 이를 공통 믿음으로 가져갈만큼 이야기를 쓰고 찾아대서) 발전해왔다고 하지 않나. shared fiction(허구)는 인간 집단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한 핵심 능력이다. 뇌는 내러티브를 생성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 일이 똑같이 개인의 심리내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나의 불편함에는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남탓이다. 상대가 어떠해서, 이상한 사람이라서, 나는 유난히 상대의 진실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서 상대가 나쁘고 나는 옳다는 식의 내러티브를 써내려간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안에 다른 내러티브를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의 나만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나의 역사를 알고 이것이 나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자기파악)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 중 내 것과 타인의 것을 구분할 수 있다. (경계인식)

논리적인 서사를 구축할 수 있다. (인지적 합리성 보유)


를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메타인지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나를 보고, 상대와 나 사이의 간격과 경계를 파악하고, 비약을 최소화한 합리적인 사고를 전개해나갈 수가 없다.


뇌는 '위협'을 감지할 수 있지만 사고를 하지 않는 한은 그 위협의 내용을 알 수 없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위협(threat)인지, 정말 외부 요인인지를 알려면 내 몸의 감각이나 느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메타인지를 사용한 자기 성찰이 없이는 '투사'만 해대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머리만 사용해서 몸과의 연결을 잃어 '진짜 내가 원하는 것과 꺼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만으로 구성하여 편하게 집어먹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불편하더라도 사회적 연결을 유지한 채 공동조절(관계에서는 소통, 타협 등)을 할 수 있느냐다.


자기조절Self-regulation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개체가 이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신경계를 안정 상태로 돌려놓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유아가 자기조절을 배우기 위해서는 성인과 함께 공동조절을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아기가 울고 보챌 때 엄마는 본능적으로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톤을 바꾸어 '어이구 그랬어?'라고 한다. 아기의 정서 상태에 공명하며 감정을 수용하며 얼르고 달래면서 아기가 진정하도록 돕는다. 놀이치료니 어디에서 열심히 말하는 공감과 수용, 발달 촉진 운운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엄마가 아기와 하는 이 경험이 바로 '공동조절'이다. 공동조절co-regulation을 해보아야 자기조절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


그러면 자기조절만 할 줄 알면 되는걸까? 내가 스트레스로 힘들 때 차분한 상태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능사일까? 내 신경계 상태만 안정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까?


우리네 일상은 더욱 복잡하다. 내 몸의 감각과 친해져서 보다 자기조절을 잘 할 수 있게 되어 안정된 상태가 된다해도 끝이 아니다. 다양한 사건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몸만 섬세해진다고 해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느끼는 위협은 온전히 주관적이기에, 그에게는 타당해도 객관적으로 볼 때는 병리적일 수도 있고 왜곡된 현실 속에 있을 수 있다. 신경계는 위협을 감지하고 대응할 몸의 상태를 만들지 위협의 내용을 분간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뇌의 내러티브 시스템은 개인의 역사, 무의식의 역동을 포함한 심리적 구조, 가족, 문화,사회적 배경 등 여러가지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아서 작동하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개인의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겉으로 온전해 보여도 내면에 왜곡이 있으면 '자기 혼자만 편안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주변의 반응이 호의적이기 어렵고, 개인은 다시 문제에 봉착하게 되며 반복되는 패턴에 빠지기도 한다.


바디워크나 심리상담, 자기계발 뭐가 되었건 어느 하나만으로 불편함을 다루고 해소해나가기 어려운 이유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이니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자신이 더욱 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몸으로, 어떤 사람은 생각으로, 어떤 사람은 예술로 접근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과 경계를 가늠하고 영감을 얻어 통찰해간다. 정답을 주장하거나 한 방식이 독보적이라고 믿는 것 또한 그 사람의 내러티브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다. 예를 들어 몸을 도저히 못 느끼는 사람은 그 방식을 경시하고 사고력을 강조해야 '자기가 괜찮은 상태에 있다'고 느끼니 그 썰을 택한다. 반대로 감정을 들여다보기가 괴롭고, 전후관계를 인식하여 따져보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그 외적인 몸의 언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안전하다. 요는 양쪽 다 반쪽짜리라는 점이다. 생각, 감정, 오감 모든 것이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기에 통합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다.


뇌는 계속 썰을 만들어낸다. 나의 심리적 안전을 위해서다. 인간에게는 그 썰에 속지 않도록 지난한 이야기들을 다시 펼쳐놓고 하나하나 살피는 능력, 즉 메타인지력이 있다. 나 자신의 안녕을 위해 어디에서 어떤 작업을 하건, 메타인지를 사용하면서 영역을 넓히고 여태 보지 않았던 부분에 빛을 비추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말로 이 세상에 내 '안전영역'을 늘리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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