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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유목민 Aug 30. 2021

대체 배우자

108배 수행 24일째 (21년 8월 30일)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를 아끼시는 분이었고(하지만 나중에 술마실때는 돌변), 엄마는 4남매 중 장녀였는데, 외삼촌들과 이모는 다들 순하고 착하다. 반면에 아버지는 7남매중에 셋째 아들이었고, 어린 내가 봐도 제일 큰 아버지만 빼고, 다들 한 성깔하시는 분들이다. 둘째 큰아버지는 둘째 큰어머니를 폭행했다가 큰어머니가 친정으로 혼자서 가버리셨고, 작은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를 폭행했다가 작은 어머니가 쥐약을 먹고 자살 기도를 하신 후 그 이후에는 폭력을 절대 사용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24살의 나이에 친구가 짝사랑하는 야학선생님(아빠)을 함께 만나러 갔다가 사랑에 빠진 후 나를 임신하고 결혼하셨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은 2월인데 내가 8월 생인 걸 보면, 속도위반이었던 듯 하다. 나의 엄마는 그당시 강원도 태백에서 가장 미인이셨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낳고 1년 후에 친할아버지가 퇴직 후 차리신 과수원에 들어가셔서 시집살이와 시골살이를 함께 하셨다. 2년 후에 내 동생이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노역하러 가셨다. 아버지의 폭력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고, 아빠는 엄마에게 폭력을 썼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나와 내 여동생은 부모님의 부부싸움과 폭력에 노출되어있었다. 


엄마가 예전에 그런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는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는데, 화장법에서부터 옷입는것까지 다 참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가 조금씩 커가자 그 관심이 우리에게로 옮겨졌는데 그렇게 편할 수 가 없었다고 하셨다. 


'대체 배우자'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를 읽다가 나온 이 용어가 묶여 있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가끔은 나에게 폭력을 쓰는 두려운 존재이자 한없이 나를 지지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 엄마를 무시하고, 엄마에게, 그리고 가끔 우리 자매에게 폭력을 쓰는 아빠를 보며 나는 '아빠같은 사람과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엄마에게만 이야기했는데, 엄마는 그걸 내가 있는 곳에서 아빠에게 그대로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로부터 보호받고 있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이용해서 아빠가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같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아빠에게 혼나거나 그런 기억은 없다. 다만 내 감정은 '내가 아빠에게 상처를 줬구나'였다. 격렬하게 반항하는 사춘기가 지나고, 대학생이 된 이후에 아빠는 나에게 한없이 자상했고, 가끔 대화가 되지 않으면 잠시 대화를 멈췄다가 깊은 대화 없이 화해했다. 꼭 부부처럼


첫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6개월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여전했다. 엄마는 알콜 의존증이 더 심해졌다. 아빠의 사업은 날로 기울어졌는데, 엄마가 평생을 모은 돈으로 마련한 분양받은 새 아파트를 담보로 걸고, 악착같이 모은 비상금은 아빠의 사업빚을 갚는데 쓰였다.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모은 얼마되지 않은 500만원도 아빠의 사업빚에 쓰여졌다. (나중에 엄마는 할부로 갚으셨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지긋지긋했다. 6년만에 다시 만나 1년가까이 사귀었던 첫사랑도 두번째 만났을때는 나에게 뼈아픈 말들로 상처를 줘왔다. 내가 캐나다 어학연수할 무렵 제대한 첫사랑 남친은 골동품 경매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곳에서 만난 경리보는 여자와 눈이 맞아, 나를 무참히 차버린 것은 헤어지고 얼마후에 그의 친구에게서 들었다. 하지만 나는 따질수가 없었다. 내가 못나서 그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1년을 술로 헤매다가, 집에 들어간 어느 날 부모님은 또 싸움을 하고 계셨다. 


엄마는 화장품 백을 벽에다가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아이라인 액체가 터져서 하얀 벽을 날카로운 동양화의 난처럼 그려졌다.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해는 나에게 가장 고통의 해이기도 했지만 행운의 해이기도 했던것같다.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두번째로 컸던 미국계기업에 인터뷰 한번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1달간의 교육기간을 거친 후 나는 혼자 떠났다. 가끔씩 집에 전화를 하면, 아버지 사업이 더이상 유지되기가 힘들고, 은행에 집도 넘어가기 직전이라는 엄마의 푸념이 들렸다. 


말레이시아 페낭은 날씨도 항상 맑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밝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그런 곳이었다. 느리지만, 느리지 않고 렌트나 음식도 비싸지 않아서 부모님이 이곳에 오셔서 홈스테이를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앞날을 내가 고민했던 것이다. 아빠 사업은 정말 망했고, 아빠는 엄마 몰래 사채까지 끌어쓰셨다. 아빠는 사면초과였다. 마침 캐나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여동생도 취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온 가족이 내가 있는 말레이시아로 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노처녀 가장이 되었다. 가족들이 함께 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넷은 항상 마음이 힘들었다. 


그 당시 이 결정으로 인해 엄마의 삶은 180도 변했다. 엄마는 알콜 의존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셨으며 무좀으로 썪어들어가던 발도 치료가 되었고 종교에 의지해 마음을 치유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지 못했다.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오신 후 아빠는 페낭의 삶에 대해서 '치욕적인 삶'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결혼 후 아빠를 챙기는 것을 좀 줄였는데 아빠는 내가 결혼 한 후에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나이를 드실 수록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책을 읽으며 아빠가 나를 '대체 배우자'로 생각하셨구나라고 생각하니 실타래가 풀렸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나는 여러번에 걸쳐 분노를 표출하면서, 자식은 결혼하고나면 끝이다, 아빠는 엄마한테 더 잘해야한다고 반복했고, 이제서야 그 말씀을 이해하신듯했다. 


부모님과 나는 지금 거리를 둔다. 아버지는 나에게, 나는 아버지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안부의 전화를 했었는데, 이제는 가끔씩 연락드려도 괜찮다. 실타래를 풀었고, 마음이 편해진 느낌이다.


원가족과의 이런 관계를 풀기도 전에 미성숙한 모습으로 결혼을 했고, 나의 남편에게 감정의 변화를 이해해달라고,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그게 통하지 않으니 분노했고, 나처럼 성숙하지 못했던 배우자는 그런 나의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마음을 닫기 시작했다. 




부부관계가 좋지 못하면 아이가 배우자를 대신해야 하는 관계 패턴이 언제든 형성될 수 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실패한 부부의 절반만이 이혼을 한다. 수많은 가정에서 배우자가 채워 주지 못하는 감정의 결핍을 아이가 메워야 한다. 편부모 역시 자신의 애정 욕구를 자식에게 채우게 할 위험이 있다. 


아이가 배우자를 대신하게 되면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예기치 못한 불운한 발달을 겪에 된다. 딸과 아버지, 혹은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과도하게 밀착되면 부모 자식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경계가 사라진다. 부모의 사랑과 부부이 사랑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부부는 공동의 인생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정도이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적인 연결을 지향한다. 그러나 부모 자식 관계는 언제나 자립하도록 놓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배우자 대신 자식에게 의지했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체 배우자'를 잃게 된다. (중략)


배우자가 채워주지 못하는 감정적 결핍을 자식에게서 채우려는 것 역시 똑같은 폭력이다. 폭력의 대상이 신체가 아닌 정서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부모와의 과도한 밀착 관계는 아이의 중요한 발달 과정을 방해한다. 


부모의 배우자 노릇을 해야 했던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 그래서 결혼을 한 후에도 자신이 배우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늘 불안해한다. 또한 그들은 희생자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립성과 자의식, 자기주장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당연한 결과로 결혼 생활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상대에게 의존하게 된다. 애착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안달할수록 상대방은 방어적으로 반응하고, 이러한 반응은 관계 상실의 두려움을 강화시킨다.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中)



오늘 108배는 계속 내 마음과 몸에 새긴다.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볼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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