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에서 자신감으로
“나 요즘 영어 원서 읽어~”
순간 눈이 동그라진 친구에게 무심히 영어 원서를 꺼내 보였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좋은 유명한 영화의 원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가증스러운 지적 허영을. 현실은 흰 종이에 쓰인 검은 글자를 한 자씩 눈으로 훑어내며, 가끔 만나는 아는 단어들과 영화로 알던 스토리를 정성스레 기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영어 원서 전문가라는 사람이 말했다. 영어 문장을 100% 이해하려 하지 말고 스토리를 따라가라고. 그의 말이 이런 상황을 위한 것이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자존심. 나는 배움 앞에서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다.
강남 교보문고에 영어 원서가 많이 비치되어 있다는 정보와 함께, 남편과 함께 서점으로 향했다. 정보대로 많은 영어 원서들이 매대에 올려져 있었다. 영어 공부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뭐니 해도 배움을 위한 준비물을 구비할 때다. 게다가 책 표지만으로도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원서가 가득한 외국서적 코너에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많은 영어 실력자들이 추천하는 영어 원서 고르는 팁이 있다.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5개를 넘지 않으면, 그 책은 내 수준에 맞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원서 초급자에게 추천하는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Magic Tree House>라는 챕터북 시리즈였다. 총 28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내 손바닥만 한 크기에 큼직한 글씨와 그림이 간간이 들어가 있는, 미국 기준 초등학교 1~2학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짧은 소설 시리즈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영문판 <어린 왕자>를 읽어보지 않았던가. 강의의 도움이 있었지만, 배움은 헛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게다가 이렇게 으쓱한 어깨로 아동소설 코너에 들어서는 것은 왠지 모양 빠지는 일인 것 같았다.
매대에는 한국에서 이미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는 번역본 원서들이 눈에 띄었다. <연금술사>,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시크릿> 등. 대체로 하얗고 고급 종이의 묵직한 한국 서적과는 달리, 영어 원서는 그 모양새부터 달랐다. 갱지의 빈티지한 느낌과 가벼운 무게감. 애초에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것은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완벽한 아이템이었다. 오감을 한껏 만족시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원서를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얼마 전 남편과 넷플릭스에서 본 <안녕, 헤이즐>의 원작 <The Fult In Our Stars>가 내 눈에 들어왔다.
원서를 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서점에서 읽는 한두 장이나 아마존 샘플북의 몇 페이지는 왜 그렇게 잘 읽히는지. “이 정도면 읽기 쉬운걸!” 하며 자신 있게 고른 책들이 열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책장 속에 쌓이기 일쑤였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한두 페이지를 훑어보며 모르는 단어를 체크했더니, 대충 5개 안에 든다. 그리고 문장 구조도 앞서 읽은 <어린 왕자>보다는 수월해 보였다. “어때? 네 수준에 맞는 것 같아?” 하는 남편의 질문에 “응, 잘 읽히는데?” 하며 가뿐하게 책을 골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아동소설 수준은 아니지’ 하며 으쓱했던 어깨는 여전했다.
키높이 신발을 벗고 바닥을 딛는 일이 이런 기분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원서 좀 읽어’ 하는 키높이 신발을 벗고, ‘초보자‘라는 맨발 모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중고 서점에서 낡아 해진 <Magic Tree House> 몇 권을 구해, 모르는 단어에 아낌없이 밑줄을 그어가며 온종일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지 확실치 않은 단어는 한번 더 확인하며 확실한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럼에도 문장이 해석이 안되면 파파고를 돌려 다시 해석해 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책을 씹어 먹었다 ‘는 표현이 적합하도록 나의 무지와 정성껏 마주했다. 놀랍게도 6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 한 권을 완독 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가짜 자신감을 내려놓고, 맨발로 땅을 감각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진짜 자신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속도는 매우 느렸지만, 가짜 자신감으로 구름 위를 떠다니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요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영어는 진짜 나를 마주할 용기와 그로 인한 성장의 힘을 내게 성실히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