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아직 모르겠다
1부, 2부는 AI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 제 생각을 정리한 글이었다면 3부는 좀 다릅니다.
직접 뭔가를 만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잘 풀린 날도 많고 막힌 날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글도 좀 더 날것으로 쓰려고 합니다. 정리된 생각보다 실제로 겪은 장면들이 더 와닿을 것 같아서요.
여기서 다룰 이야기들은 올해 2월부터 시작해서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전부 진행형입니다. 돈을 엄청 번 솔루션도, 베스트셀러 앱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냥 의미있는 실험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고민으로만 끝났을 일들을, 이제는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희열이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고 있어요.
도파민 돋습니다.
저 진짜 코딩 못합니다.
사회초년생 때 C++ 입문서를 산 적은 있어요. 엑셀 다루는 걸 (다른 사람들보다 좀 깊이) 좋아했으니 프로그래밍도 한번 해볼까 싶었거든요. 'Hello World' 한 줄 띄워보고 바로 덮었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는 지금도 미지의 영역이죠. 더 이상 들어가면 다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올해 2월, 실시간 통역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들기로 했습니다.
시작은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일본 파트너사 쪽에서 태블릿 관련 소싱 의뢰가 들어왔는데, 현장 얘기가 건너건너 들려왔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일본 고객사 매장에서 PoC를 진행 중인데 특정 브랜드명이나 제품명 번역이 잘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다 지향성 마이크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얘길 듣는 순간 알아챘습니다. 시끄러운 매장에서 음성인식률을 높여야 하는 숙제가 있다는 걸.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자신들의 솔루션에 자긍심이 넘쳐서 하드웨어는 그냥 솔루션이 돌아가기만 하면 그뿐이라는 인식이었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솔루션은 그에 걸맞는 최적의 하드웨어 위에서 꽃을 피웁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각자의 영역에서 상성과 밸런스를 갖춰야 현장의 문제가 풀려요. 어느 하나만 훌륭하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구글 번역기를 뛰어넘고 파파고를 뒤집겠다는 거창한 포부가 아니라, 현장에서 뭐가 문제인지 직접 보고 싶었던 것 뿐이죠. 그래서 '하드웨어 테스트용' 통역솔루션을 직접 만들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처음부터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
하도 주변에서 바이브코딩이네 뭐네, 휴가 동안 앱을 몇개를 만들었네 떠들어대길래 저도 제 AI를 불러냈습니다. 제갈량이라고 이름 붙여준 그는 아주 쿨하게 대답하더군요.
'주군, 저와 함께라면 상대하지 못할 적이 없고 정복하지 못할 고지가 없나이다.'
그러면서 명쾌하게 설계도를 내줬어요. 파이썬으로 코딩하고, API 활용해서 음성 인식 → 번역 → 음성 합성, 3단계 파이프라인. 알겠고, 그래서 어쩌면 되겠니? VS Code를 열고 터미널에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암호 같은 걸 입력하라고 하더군요.
VS Code? 앱을 설치해야 하는건가?
Microsoft store에서 찾아 봤습니다.
설치 버튼이 아니라 열기 버튼입니다. 뭐지?
앗! VS Code는 이미 제 컴퓨터에 있었습니다. 뭔지 몰랐던 것 뿐이죠.
열었더니 이번엔 터미널을 어디서 여는지 몰랐습니다.
자존심 상하지만 제갈 선생한테 물어 어찌저찌 찾았더니 이번엔 에러가 쏟아졌습니다.
단계마다 막히고 풀고, 막히고 풀고, 막힐 때마다 몰랐던 게 하나씩 아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솔직히 까만건 다크모드 화면이고, 하얀건 글자 수준이었죠.
Ctrl(컨트롤) 버튼은 거들 뿐, C와 V가 자판이 닳도록 일합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복붙 삽질을 계속 해야 하는건가?
그 막막함 속에서 머리나 식힐 겸 제 특기인 이름 붙여주기를 시전합니다.제갈량처럼.
프로젝트 서희.
993년,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혼자 적진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상남자. 칼도 군사도 없이, 말 한마디로 침략군을 돌려보내고 강동 6주까지 되찾아온 문과생 출신 외교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었듯, 이제부터 너는 '말 한마디로 실리를 챙기는 디지털 외교관'이다.
거란의 대군처럼 보였던 시뻘건 에러 메시지들은 그 순간부터 저를 조롱하지 못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모조리 물러나게 하리라.
이름이 생기니 방향이 생겼습니다. 방향이 생기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확신은 없었지만, VS Code는 이미 거기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랑은 이렇게 복붙에서 싹트고 있었습니다.